晉川府院君 元正公 휘 즙 (楫)선조님 묘소 : 경남 진주시 상대동
 

                 
 配位 辰韓國夫人 鐵城李氏 (철성이씨)  묘소:진주시 명석면 외율리 내율산 밤실
 

晉川府院君 하즙(河楫) 9세손
 

譯文

선생의 휘는 즙(楫)이요, 字는 득제(得濟)이신데, 1303년에 진주의 이구산(尼丘山)밑 여사촌(餘沙村 :오늘의 南沙)에서 태어나셨다. 1321년에 천거로 판도좌랑(版圖佐郞)이 되시고 삼사(三司)의 판관(判官)을 역임하셨으며, 1324년에 진사(進士)를 거쳐 문과의 갑과(甲科)에 3등으로 급제하셨다.
1347년에 원제(元帝)가 정치관(整治官)을 두어 권세 있는 간신과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해치는 무리들을 다스리게 하여 계림군공(鷄林郡公) 왕후(王煦)와 좌정승(左政丞) 김영돈(金永旽) 등에게 여러 도의 안렴사(按廉使)를 겸하게 하여 토지를 조사시켜 억울함을 면하도록 하게 할 때 선생이 역시 사헌부 대관(臺官)으로 참여하셨다.

이에 기황후(奇皇后)의 족제(族弟)인 기삼만(奇三萬)이 권세를 믿고 백성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는 등 행악(行惡)한 죄를 선생께서 먼저 들추어 이를 매질하고 하옥하여 죽게 하니, 그 집에서 황후에게 호소 하였으므로 원제(元帝)가 듣고 크게 화가나 직성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를 보내어 정치관(整治官) 백문보(白文寶) 신군평(申君平), 전성안(全成安)과 선생, 하즙(河楫) 남궁민(南宮敏), 조신옥(趙臣玉),김달상(金達祥), 노중부(盧仲孚), 이천백(李天伯), 허식(許湜), 이승윤(李承閏), 안극인(安克仁), 정광도(鄭光度), 오경(吳璟), 서호(徐浩), 전녹생(田祿生)을 매질하고 , 오직 안축(安軸) 왕후(王煦)는 황제의 전지(傳旨)로 용서하고 판밀직(判密直) 김광철(金光轍), 대호군(大護軍) 이원구(李元具)는 병 때문에 면하게 하였다.

서해도(西海道: 황해도) 안렴사로 계셨을 때 아드님 윤원(允源)께서 교주도(交州道:강원도)안렴사가 되시니 시를 보내어 이르기를,

 

              「아들은 교주의 안렴사요.

                 아비는 서해의 안렴사니,

                이런 일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

                성은(聖恩)이 한 집안에 편중하니,   

                뜨거운 보국 정성 날로 더욱 더 생기네」

 

하시었고, 또 아드님께서 강주원수(江州元帥)되셨을 때 시를 보내어 이르기를,  

 

              「북쪽 변방 어지럽고

               관동지방 차가우니

               남아 절개 굳게 지켜

               이 나라를 도울지라」

 

하시었다. 손자이신 자종(自宗)께서 풍천군사(豊川郡事)가 되었을 때 선생께서 시를 이르기를,

        「서해도의 풍속지리 내 옛날 보았는데,

          산 높고 물 맑은곳 인심 또한 순박더라.

          오늘은 네가 새로 태수되어 부임하니

          삼가 네 양친을 욕되게하지 말라」
     

하시었고, 또 중국으로 사신 가실 때 선생께서 시를 보내어 이르기를,

        「중국가는 내 손자 울면서 보내니

          돌아 오는 길 풀은 푸르고

          절기는 청명 때이네.

          내 나이 70 넘어 다시 보기 어려우리니

          만리길 무사히 다녀오길 바랄 뿐이네」 

          라고 하셨다.
     

1369년 4월 5일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서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어 20일에 부임하시고 1372년 정월 20일에 왕명을 받아 상경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임명 되시고, 1377년에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보국숭록대부 진천부원군(輸忠佐理功臣 重大匡輔國崇祿大夫 晉川府院君)에 봉해지셨다.
그 후 송악(松岳)의 작은 멧부리 옆에 집을 지어 사셨고, 그 동쪽에 몇 칸 집을 지어「송헌(松軒)」이라 이름하였다.
그 짜임은 정연하지 않으나 정남(正南)으로 향하였기로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며,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어서 족히 깊은 심회를 풀 만하였으므로 공암(孔巖) 허형(許衡)등과 더불어 도의계(道義契)를 맺어 서로 늘 모여 한가히 즐겨 노셨다. 매화를 읊은 시에 이르기를,

 


남사생가 원정공께서 심으신 매화


원정매 시비

 

                   「뒷 뜰에 일찍이 매화 한 그루 심었더니,

           

                     섣달 날씨에 꽃답고 아리땁게 나를 위해 피었구나.

           

                     밝은 창 가에 주역 읽고 향을 피워 앉았으니,

           

                     세상의 모든 걱정 아주 잊을 만 하네.」

 

하셨다.
1380년 8월 9일 78세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진주 동쪽 저동(猪洞)의 양지쪽 인좌(寅坐)에 묻히셨다. 시호는 원정(元正: 의를 행하여 백성을 기쁘게 함이「元이요, 정의로써 남을 복종하게 함이「正」이다) 이시다.
후손들이 유상(遺像)을 진주 북쪽 집현산(集賢山) 응석사(凝石寺)에 봉안하였다.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이, 관인(寬仁)하고 중후(重厚)하여 희로(喜怒)를 나타내지 않으시며, 일을 처결함이 정직하여 그 엄정하심을 감히 범할 수 없다고 일컫고 찬(贊)을 지어 이르기를

 

    「기풍이 존엄하시며 화순하고 너그러우시어 환히 비추는 가을달이요,

     

    부드러운 봄바람이로다. 품으신 영기 밖으로 퍼지니, 덕을 쌓으심이 그 안으로부터로다.

     

    선행을 좋아하심 두터우셨고, 일을 처리하심 능통하시었도다.

     

    끼치신 덕망 꽃다이 전해져, 찬란한 빛 다함 어찌 있으리요?

     

    응석사 있는 집현산 위에 그 기운 높이 푸르러있도다」

하였다.

배. 진한국부인 (配. 辰韓國夫人)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대제학(大提學) 이우(李瑀)의 따님이며. 슬하에 1남 2녀를두셨다.
아드님은  고헌공(苦軒公)윤원(允源)선조님이며 .따님 두분은 晉州姜氏 은열공파 강수명(姜壽明 )과 晉州姜氏 박사공파 강시(姜薯)에게 出家 하여 姜씨 집안을 번성(繁盛) 케 하고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 家門 을 빛내였다.


묘소:경남 진주시 상대동 산 46

 

배위  철성이씨 묘소:경남 진주시 명석면 외율리 내율산 밤실

 


 
남사마을  원정공 유적비

 

고려사

○ 이문소(理問所)에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관원을 국문하여 삼만(三萬)을 부당하게 죽인 죄를 강제로 뒤집어 씌우려 하였는데, 그들이 불복하자 모두 옥에 가두었다. 
 

○ 원나라에서 공부낭중(工部郎中) 아로(阿魯)와 형부낭중(刑部郎中) 왕호유(王胡劉) 등을 보내 와서 기삼만(奇三萬)의 사건을 심문하였다. 아로 등이 정동성(征東省)에 앉아서 정치도감의 관원 서호(徐浩)를 심문하고자하여 목을 사슬로 묶어서 나왔다. 삼만의 아우 선재(善財)가 호를 꾸짖기를, “우리 형이 몇 번인가 너의 아내를 간음하였는데, 그 원한을 품고 때려 죽였는가” 하니, 호가 말하기를, “내 아내는 양반의 집안이니 어찌 추한 소문이 있겠는가. 비첩(婢妾) 같으면 반드시 더러운 행실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곧 선재의 어머니가 천하였으므로 호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 9월에 감찰지평(監察持平) 김한귀(金漢龜)를 옥에 가두었다. 일찍이 상서(尙書) 고신(高信) 익흥군(益興君) 거(?)의 아내 박씨(朴氏)를 간통하였는데, 한귀가 박씨를 조사?문초하고 사건을 일으키려 하였더니, 익흥군이 왕에게 호소하고 기철(奇轍)이 또 문초하지 말도록 청하여, 왕은 어쩔수 없이 도리어 한귀를 죄주었다. 

○ 겨울 10월에 이문소(理問所)에서 밀성부사(密城副使) 이손경(李孫慶), 여흥부사(驪興副使) 이몽정(李蒙正), 서주부사(西州部使) 조동휘(趙東暉)를 가두었으니, 정치도감의 통첩을 받고 환자(宦者)와 부호와 세력이 강한 자들의 전장(田莊)을 회수하였기 때문이다. 
 

○ 김인관(金仁琯)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원나라에서 고용보를 소환하였다. 

○ 익성군(益城君) 서를 원나라에 보내어 동녀(童女)를 바쳤다. 

○ 원나라에서 기삼만의 죽은 일 때문에 직성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를 보내어 정치관(整治官) 백문보(白文寶).신군평(申君平).전성안(全成安).하즙(河楫).남궁민(南宮敏).조신옥(趙臣玉).김달상(金達祥).노중부(盧仲孚).이천백(李天伯)?허식.이승윤(李承閏).안극인(安克仁).정광도(鄭光度).오경(吳暻).서호(徐浩).전녹생(田祿生)을 곤장때렸다. 다만 안축(安軸)광 왕후(王煦)는 황제의 명으로 용서하였으며, 전 밀직(前密直) 김광철(金光轍)과 전 대호군(全大護軍) 이원구(李元具)는 병중이었으므로 곤장 맞는 것을 면하였다. 황제는 또 친서를 내려 정치도감을 다시 두게 하고 왕후로 하여금 판사(判事)가 되게 하였다. 이 때 김영돈(金永旽)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후는 그와 함께 따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황제가 이를 힐문하고 후에게 위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 행성낭중(行省郎中) 이수산을 원나라에 보내어 동녀(童女)를 바쳤다. 

○ 11월에 왕후를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에 임명하였다. 

○ 12월에 천수군공(天水郡公) 강백(康伯)과 찬성사(贊成事) 강윤충(康允忠)을 원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