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헌공 선조님  묘소:경남 진주시 상대동 산 46

 

晉山府院君 하윤원(河允源) 10세손


선생의 휘는 윤원(允源)이요 자는 담지(湛之)며 호는 고헌(苦軒)인데 1322에 이구산(尼丘山)밑에서 태어나셨다. 1342年에 진사(進士)를 거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교교감(典校校勘)에 보직되었으며 공민왕조에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사헌부의 기강을 바로 잡으시니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1361年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서울이 함락 되었으므로 임금이 복주(福州: 경북안동)로 피난하였는데 선생님께서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정세운 (鄭世雲) 이성계 등 네 대장들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였고, 1363年 윤3월 책공(策功)때에 二등 공신이 되셨다. 일찍이 외직으로 경상도,황해도,경기도,강원도의 안렴사와 원주,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셨는데 이르시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높았다. 신돈(辛旽)이 권력을 남용할 때 홀로 아첨하지 않으셨으며 우왕 초에 예문관 제학에서 발탁되어 사헌부 대사헌에 오르셨는데 집무하실 때 마다 (知非誤斷 皇天降罰) (지비오단 황천강벌)「그릇된 줄 알면서 잘못 처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
라는 여덟 자를 써서 걸고 일을 보셨다. 일평생 청렴으로 마음을 닦으시고 굳센 의지로 절약하시니 경박한 사람들도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모친상을 당하시어 여묘(廬墓)에 사시니 우왕이 글을 보내어 불러 말하기를

"3년의 상제는 비록 고금에 행해지는 법이나

백일만에 상복을 벗는 것은

그 때의 형세를 따르는 일이니

마땅히 효성을 옮겨 충성을 하기위해

슬픔을 누르고 부름에 응하오"

하였는데 이 글이 고헌 선생에게 채 이르기도 전에 돌아가시니 모두 애석해 하셨다.

아래의 詩는 고헌공(휘允源)선조님께서 강주원수로 계실때 이성계 정세운 등과 같이 홍건족을 토벌하기 위하여 出征 중에 고향을 생각하며 읊은 詩이다 (慶流齋 懸板詩)

진영의 출입문에서 우연히읊음 

" 양성정 서쪽 촉석루  동쪽 대수풀 깊은 곳에

붉은 감 주렁 주렁 매달렸겠지

붉은 가을 빛 집안에 가득 한데

오히려 주인 없는 쓸쓸함이

전쟁터에 나온 무부(武夫)의 꿈속에 서리는 구나."

 

 

목은(牧隱)이색(李穡)이 답장 하기를

원문

雁榮相聯又北飛

數行書札落柴扉

琶琶莫弄投壹處

月白江州淚濕衣

幾見落花 枝上飛

春風旋柴擁黃扉

遲公一辨龍頭會

白髮更聞金樓衣

번역

" 기르기 떼 나란히 북쪽으로 날더니

몇줄의 편지가 사립문에 떨어졌네.

비파를 투호 자리에서 희롱하지 마소.

달빛 흰 강주(江州)에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리니

낙화가 가지위에 흩날림을 몇 번이고보았는데

봄바람에 깃발이 정승집을 알았네.

공과 한번 용두회(龍頭會)를 못 가졌는데

백발되어 또다시 좋은 소식 들었네."

목은 이색 선생은 고려말 대학자 이시며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선생과 더불어 삼은(三隱)선생중에 한분이시며 이세분들은 고헌공선조님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며 목옹공 휘 (自宗)선조님 군사공 휘 계종(啓宗)선조님과도 가깝게 지내셨다고 한다 현감공  하척(河 滌)선조님은 이분의 제자이자 사위이시다

고헌공께서 상주(尙州)에 계실 때 재상 안축(安軸)의 판상운(板上韻)詩 에 차운(次韻)하기를

원문

爲州忽忽己三年

政拙安能及古賢

縱被推臍猶不去

自將尺素傀蒼天

번역

"고을을 다스린 지 어느새 3년이 되었건만

정치가 졸하거니 어찌 옛날의 현인에 미치랴

배척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가지 않으니

스스로 시소(尸素)로 저 푸른 하늘이 부끄럽구나

하윤원(河允源)

 

동문선 제9권에서 발견한 詩시

오언율시(五言律詩) 이강(李岡)

낭중 하윤원을 시로 초청하며[詩邀河允源郞中]

혼자 앉으니 그윽한 흥(興)이 도네 / 獨坐成幽興

텅 빈 집안에 이끼[苔] 깊은데 / 苔深四壁空

연못에 비 내리니 우거진 고미[菰蒲] / 菰蒲一池雨

다락에 바람 오니 서늘한 베개 / 枕?滿樓風

병 속에는 얼음 같은 수리 있고 / 壺底氷漿冷

소반에는 빨간 들 과일이 있도다 / 盤心野果紅

이 사이의 한가한 멋을 / 此間閑氣味

그대와 함께 하길 생각하네 / 思與阿兄同

주D-001]시소(尸素) : 시위소찬(尸位素餐)이란 말인데, 송장처럼 일은 못하고 자리만 지키는 것을 시위(尸位)라 하고, 밥값을 하지 못하고 공밥을 먹는 것을 소찬(素餐)이라 한다.
성호사설 제25권

 

포은(圃隱)정몽주선생의 詩

" 나라에서 동쪽을 중요시하여 왕의 명으로

하공에게 원주목사로 명하였네.

부임 삼년만에 명성을 떨치니 왕의 말씀이

나 그대를 가상하게 생각하노니

이어서 불러 맑은 조정에 드시니

원주 백성은 이제 남긴 사랑 찬양하네.

승 운감이 어찌 뜬 세상의 인정이뇨  

노래지으니 뜻이 거기있었네

원주 사람들이 보고 참지 못한

젖먹는 아이가 부모같이

사모한 마음 차마 보지 못하겠네."

하윤원公이 원주 목사(原州) 임기를 마치고 소환되실 때 포은 정몽주가

 

치악산의 중 운감(云鑑)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 어린애가 즐거워하며 어머니의 곁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의 은혜와 사랑을 미처 다알지 못하더니,

어머니가 가니 어린애는 울부짖는구나.

추위와 굶주림이 몸에 다가옴을 어찌하리요,

북원(北原)의 지난날 정치는 어질고 덕이 있음이

곧 이와 같았네. 빛나도다, 몇 천년 지난 뒷세상에서,

다시 소남(召南)의 시같은 송가(頌歌)를 부르네."

하시었다. 하윤원公이 원주(原州)에서 임기를 마치고 소환되실 때 중 운감(云鑑)이 시를 지어 칭송하니 고관들이 운(韻)을 나누어 화운(和韻)할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내(乃)자」를 얻고 봉익대부(奉翊大夫) 이구(李玖)는「하(下)자」를 얻었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이구(李玖)의 시에 이르기를,

" 여산(廬山)의 혜원(惠遠)이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며,

한가하게 동림(東林)을 향하여 일찍이 결사(結社)하였었네.

사귀는 도리가 도리어 세상의 도의를 따라 쇠퇴하니,

그 뒤로는 선비와 중의 서로 추증함이 적어졌다

운감 스님이 옛것을 좋아하나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어서,

원성(原城)의 의로운 절에 홀로 누웠었네.

글 잘하는 태수가 왔다는 것을 기뻐하고

석장(錫杖)을 날려 밝은 달 아래에서 문을 두드렸네.

함께 강루(江樓)에도 오르고 절의 누에도 오르면서,

넉넉히 시와 술을 갖고 한가하고 맑은 정취 배불렀다.

태수의 임기는 차[滿]고 정치는 흐뭇하여 조정으로 떠나가니,

원숭이와 학(鶴)있는 산언덕에서 스님은 누구와 더불어 밤을 보낼까.

바람편에 시를 부치어 고을에 남긴 사랑을 칭송하니,

맑은 시사(詩詞)와 아름다운 정서가 고가(高價)함을 다투네.

내 이 시를 보고 머리를 돌려 이 사람을 생각하노니,

치악산 그윽하니 거마가 멀구나.

벼슬을 그만두고 내 가서 그와 추종하고자 하나,

갈포(葛布) 두건(頭巾)과 들사람의 옷을 누구에게서 빌릴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46권 江原道 原州牧 名宦 高麗≫

고헌공 하윤원(河允源)선조님은 사직공 10세손이며 원정공 휘 집(河楫)선조님의 아드님이시다. 고려 충혜왕 말년에 과거에 올랐다. 공민왕 조에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써 여러 장수를 따라 경성을 회복하여서 2등 공신이 되었다. 신돈이 정사를 마음대로 할 적에 홀로 아첨하지 않았다. 신우 초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知非誤斷 皇天降罰 그릇된 줄 알면서 잘못 처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라는 여덟 글자를 목판에 써서 헌대(憲臺) 위에 걸어 놓고 보았다.

원주(原州)에서 임기를 마치고 소환되실 때 중 운감(云鑑)이 시를 지어 칭송하니 고관들이 운(韻)을 나누어 화운(和韻)할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내(乃)자」를 얻고 봉익대부(奉翊大夫) 이구(李玖)는「하(下)자」를 얻었다.

반남 박상충(潘南 朴尙衷)이 서(序)에 말하기를 '판전교시사 우문관 직제학 하공 (判典校寺事右文館直提學 河公)이 원주에 목사 되어 오니 백성이 편안하고 관리는 정숙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높더니 소환됨에 이르러 원주 백성이 공을 사모하는 깊이가 어린 아이가 부모를 사모함보다 더하였으니 공이 원주 백성의 부모 된 소이를 알 만 하다' 고 하였으니 1375년에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보국 진산부원군(輸忠佐理功臣 重大匡輔國崇祿大夫 晉山府院君)에 봉해지시고, 이듬해에 모친상에 계실 때 슬퍼함이 지나쳐 병환을 얻어 12월27일 진주 명석면 외률리 밤실 여묘살이에서 병을 얻어 동사로 돌아가시니 향년이 55세였다.
우왕이 조서(詔書)를 내려서 불렀으나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여묘살이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현 진주 상대동 원정공선조님 묘소 밑에 장사하고 유상(遺傷)을 응석사 영당(影堂)에 봉안하였다.문장과 가법(家法)이 세상에 이름났고 지으신 시문이 대동시림(大東詩林)과 문선승람(文選勝覽)에 많이 있다 하나 수집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럽다. 벽오당(碧梧堂) 서(序)에 '아첨하지 않은 고풍과 맑은 아치(雅致)는 가히 숭상될 일이라' 한 말이 있고 단구지(丹丘誌)에는 진산부원군 하윤원(晉山府院君 河允源)이 양정(凉亭)에 강사(江舍)를 지어 노년을 보냈었다고 전한다.

묘소는 부인 정경부인 청주하씨와 합봉이다  묘소:경남 진주시 상대동 산46

 

> 하윤원
河允源, 晋州人. 父, 贊成事致仕, 封晋川君卒, 子僧元珪火葬, 謚元正. 允源, 忠惠末登第, 補典校校勘. 恭愍朝, 以典理摠郞從諸將, 克復京城, 策功爲二等. 嘗出按慶尙·西海·楊廣·交州四道, 牧原·尙二州, 所至有聲績. 辛旽用事, 允源不謟附. 辛禑初, 擢拜大司憲, 封晋山君, 書“知非誤斷, 皇天降罰”八字於栍, 每赴臺, 必掛之, 然後視事. 居母憂廬墓, 下書徵之曰, “三年行喪, 雖古今之通制, 百日卽吉, 因時勢以從宜, 可移孝以爲忠, 其抑哀而赴召.” 書未至卒. 子有宗·自宗·啓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