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공 휘(諱) 담(澹)선조님의 묘소 :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2동

관찰사공 하담(河澹)12세손
 

진양하씨 단계공파 시조로 알고 있는 동정공 하성(河成)이라는 분은 충렬공 諱 위지(偉地) 선조님의 7대조이신데 1828년에 발간된 무자보 족보에서 사직공 6세조이신 참지공 하의 (河義) 선조님과 같은 계대에 합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얼마전에 사직공파로 복원되었습니다
 
2000년에 새로 발간한 진양하씨 사직공파 대동보에는 충렬공 諱 위지(偉地) 선조님의 계보도 함께 합보되어 수록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단계공 후손들은 아직까지 통합에 반대하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사직공 12세손이며 휘(諱)는 담(河澹)이며 충열공 하위지의 부친이시다 중조는 휘(諱)   성(成)이며 벼슬이 주부동정(主簿同正)이고 증조부는 보승별장 휘 (諱) 현(玄)이시며 조부는 휘(諱) 윤(胤)이시며 고(考)는 문화평리 휘(諱)지백(之伯)이시다 태종(太宗)2년(1402년), 식년시(式年試) 을과 (乙科)에 합격했다 1928년에 간행된 진양하씨 세보(晉陽河氏世譜)1권에는 하위지 부친 하담(河澹)의 기록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진주에 세거(世居)하다가 선산부 서쪽 연봉리로 옮겨 와 살았고 야은 길재의 문인인 강호 김숙자와 도의(道義) 로 친교를 맺었었다. "이로보면 하담이 야은 문하에서 공부하기 위해 고향인 진주에서 선산으로 옮겨와 지내다가 눌러 살게 되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 충의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공적 의 글이 실려 있다 제주상선 1척이 추자도에 왔다가 왜적에게 포위되자 배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갔는데 왜적이 무려 5일 동안이나 수색하여 7명을 사로 잡았다 제주도 안무사 정을현(鄭乙賢)과 판관 하담이 불기운이 있는것을 바라보고 모군(募軍)103명을 삼판선 17척에 태워 보내어 찾아 나서게 하였는데 추자도에 이르니 적선 3척이 막 떠나려 하는지라 우리배가 세길로 나누어 적선 2척을 뒤 쫓아가서 협공함에 왜적이 많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왜적3명을 목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우리 대정사람 3명을 구출하여 돌아왔는데 적선1척은 날이 저물어 뛰쫓아가 잡지 못하였다 고 한다 나중에 태종임금이 이사실을 듣고 태종임금이 명하여 정을현을 가정대부 종2품에 승급시키고 하담은 공조정랑을 제수하였다

세종6년1424년 6월15일에 하담은 경상도 주전별감으로 나가서 엽전10관을 만들어 바치는데 다음해인 세종7년1425년1월17일에  경상좌도 주전소 에서 불이나서 주조한 돈과 구리및 하담의 의복과 마패를 모두 손실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해 9월3일 경상좌도 주전별감 김자양(金自養)이 전임별감이 만든 돈이 2.102관 291문이고 이번에 만든것이 3224관 297문으로 합계5.326관 578문이라고 아뢰는 것으로 보아 하담은 세종7년 봄까지는 경상좌도 주전별감으로 역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9년 1427년 정미 2월6일에 세종은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하담과 양천(陽川)현령 남양덕(南陽德)이 임지로 떠나는 인사를 올리자 이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령이 나가 백리를 다스리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그래서 이런뜻으로 친히 불러보고 명하여 보낸다 경상도 벼농사가 풍년인 듯하나 충실지 못하고 양천은 완전 실농이라 하니 내가 심히 걱정이 크도다 각각 그 마음을 다하여 내 지극한 뜻을 받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