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공(觀察使公) 하형(河泂) 12세손
 

 

선생은 사직공(司直公)의 12세손이며 고려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이성계의 집요한 동참 제의에도 불고하시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를 지켜 두문동 72현에 가담하셨던 목옹 하자종(河自宗) 선생의 9男妹 다섯 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나셨다.

선생은 어린 시적부터 천품(天稟)이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시며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하셨다.다섯 형제가 함께 학업을 닦아 도학문장(道學文章)이 일세(一世)에 떨치시더니 형제 중 먼저과거에 올라 일찍 공직(公職)에 출사(出仕)하였다.
관직(官職)으로는 좌랑(左郞), 판관(判官), 정랑(正郞), 군수(郡守), 관찰사(觀察使)를 두루 역임하셨는데 정랑(正郞)까지는 경관직(京官職)으로 계셨으나 군수(郡守)때부터는 외관직(外官職)으로 재임하셨으니 재녕군수(載寧郡守)와 풍해도(豊海道) 관찰사를 역임하시고 퇴임 후에 한양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정착 하시게 되니 선생의 후손은 황해도 일대에 널리 퍼저 살게 되었는데 세월이 흘러 뒷날 후손들이 남쪽으로 낙향한 바 있다.
 정부인 연안이씨(亭夫人 延安李氏)와 아산 김씨(牙山金氏) 두 분의 부인에게서 세분의 아들을 두시니 그 첫째는 충순위(忠順衛) 휘 소미(紹美)로 그 후손은 남원신월(南原新月)과 곡성신기(谷城新基)로, 둘째는 충순위(忠順衛) 휘 소치(紹致)로 후손은 거창봉계(居昌鳳溪)와 합천상매(陜川上梅), 밀양 삼문동(密陽 三門洞)에, 셋째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지낸 휘 소의(紹義)의 후손은 고성본당(高城本塘)에 각기 세거(世居)하여 모두 누대(累代)에 걸쳐 덕망이 높고 지금도 가세가 넉넉한 편이다.

선생의 유택(幽宅)이 풍해도 안악부 산천군 산천면 독재산 아래에 있고 비문(碑文) 상석(床石)이 갖추어져 있으나 국토분단으로 이를 살필 수 없고 발이 미치지 못하여 자손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함이 가이없어 거창봉계(居昌鳳溪) 문중의 영모재(永募齋)에서 오랜동안 향화(香火)를 받들더니  이제 3문중이 뜻을 모으고 정성을 다하여 큰 집안이 살고 있는 남원 신월 옥계봉에 정성을 받쳐 선조의 설단(設壇)을 세워 받들고 있다.

이 설단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로 서로의 정의(情義)를 나누고 있다. 전략(前略)....

이곳에 설단하여 비분(悲憤)을 참고 봉영(封靈)코자 하오니

於是乎 조손(祖孫)이 서로 의지하고 천리신도(天理神道)가 감응함이 마땅 하니로다.

신단비(神壇碑)에 실기(實記)를 새기고자 후손들의 한 다음을 충효전가(忠孝傳家)함이여, 길이길이 빛나라.

남북이 막힘이여, 봉계에서 봉사(奉祀)터니 옥녀봉 양지바른 곳에 설단하고 새기노라.

짧은글 무딘비갈(碑碣)로 선영(先榮)을 기리도다.

진양하씨 대해(大海)를 향해 면면히 흐르거니 언젠가 다시 찾을 날 두 손 모아 비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