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贈) 영의정공(領議政公) 보(溥)선조님의 묘소 뒷쪽:충북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 257

증(贈) 영의정공 (領議政公) 하보(河溥) 12세손

 

       증(贈) 영의정 (領議政) 휘 보 (溥)선조님의 유허비
선생은 사직(司直) 시조의 12세손이며 좌의정 목옹공(木翁公)의 다섯 아드님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셨다. 선생의 출생지는 네 분의 형님들과 같이 이구산(尼丘山) 아래 여사촌 이라고 전해진다.
그 뒤 부친이 등과(登科)하여 송도(松都)로 이주하게 되어 그 곳에서 형님 들과 같이 성장하면서 면학(勉學)에 힘썼다. 오형제 중 막내아들로 자랐기 때문에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형들로부터 도 귀여움과 학문에 대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백형(伯兄) 휘 왕은 군사(郡事)와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둘째 형 휘 형(泂)은 풍해도 (지금의황해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셨고, 셋째형 휘 연(演) 문효공(文孝公)은 의정부 (義政府) 삼정승(三政承)을 두루 거치고 1451년에는 하씨(河氏)의 처음 족보(族譜)인 신미보(辛未譜)를 간행하셨다.
넷째 형 휘 결(潔)은 인천군사(仁川郡事)와 사간원(司諫院) 대사헌(大司憲)을 지내셨고, 다섯째인 선생은 1425년부터 수년 동안 고양현감(高陽縣監)으로 재직하셨다.

선생은 아버지 목옹공(木翁公)과 고매한 인품을 갖춘 형님들의 후광을 받아 성품이 온후하고 특히 효성이 지극하시고 붕우간(朋友間)에는 믿음으로 상교(相交)하며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인의로써 올바른 정사를 보살폈다. 고양현(高陽縣)은 한양에서 지척(咫尺)인지라 세종(世宗)임금께서도 '하군(河君)이 고양 (高陽)을 다스림과 고양현(高陽縣)이 하군을 얻음이 옛날 아닌 지금에 있었서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오늘날 태평세월이 오래되어 백성이 전쟁에 휘말리는 괴로움을 모르고 오직 자급자족의 생업에만 종사하니 그 땅을 지키는 치세(治世)에 전념치 않아도 큰 탈이 없을 것인데 하물며 하군(河君)은 인(仁)으로 무육(撫育) 하고 의(義)로써 베푼 공적이 얼마나 크겠는가?  하군같은 목민관(牧民官)은 흔치 않을 것이다.'라고 극찬을 하셨다고 하니 선생의 덕망을  어렴풋이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선생은 실직(實職)으로 종육품 벼슬인 현감(縣監)에 지나지 않았으나 증직(贈職)으로 영의정 (領議政)을 제수 받은데 대하여 의아하게 여기는 분이 계시나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증직제도 (贈職制度)는 아들이나 증손까지에 이품(二品)아상의 벼슬아치가 있어야 증직상신(贈職上申)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나 임란 후에는 이 제도 시행에 융통성이 생겨 명유(名儒), 충절신(忠節臣), 효행(孝行)이 뛰어난 효자에게도 상당한 품계(品階)를 증직한 경우가 많았는데 선생은 생전에 부모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음으로 뒷날 집안의 거유(巨儒)들이 발의(發議)하여 지역유림(地域儒林)의 인정을 받아 최고의 증직(贈職)이 수여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조(高麗朝)의 병부상서(兵部尙書)을 역임하셨던 목옹공(木翁公)  자종(自宗)께서 청주목사(淸州牧使)로 계실때 민정시찰(民政視察) 차 석화(石花)지방에 들러 그곳의 아담한 풍치에 경탄하시고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로 삼기를 마음으로 작정하셨는데 효성이  지극하신 선생이 선고(先考)의 유지(遺志)에 따라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둔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향년 69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는데 그 후예들이 오늘날 석화문중(石花門中)을 이루어 세거(世居)하고 있다. 선생의 장자 정서(呈瑞)는 사헌부 감찰 벼슬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셨고,
그 뒤 5세손 운(雲)과 응상(膺祥)은 임란공신으로 순국하시어 현재 충남 보령의 임란공신 (壬亂功臣) 호국제단(護國祭壇)에 배향(配享)되어 계신다.
이후에도 거유(巨濡), 충절(忠節), 현관(賢官)으로 이어지는 후손들이 대를 내려오니 원원유장(源遠流長)과 근심엽무(根深葉茂)는 자연이치이며 선생이 생시에 자손에게 충효를 역설하여 온 결과의 보은(報恩)이라 할 것이다.

 묘소: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환희1구 산101번지

※그동안 충북 청원군 옥산면 환희 1구 산101번지에 모셔저 계시던 증 영상공 보(溥)선조님과 아드님이신 승정원좌승지 정서(呈瑞)선조님묘소가 있는 주위의 산이 너무 험준하고 묘사 지낼때 마다 길이 없어 일일이 길을 내어야 만 갈수 있는 그런 지역으로 후손들이 아주 어려움을 느껴  부득이 지난 2006년 9월 20일 후손들이 살고 있는 충북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 257번지로 이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