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贈) 영의정공 (領議政公) 하보(河溥) 12세손
증(贈) 영의정 (領議政) 휘 보 (溥)선조님의 유허비 선생은 아버지 목옹공(木翁公)과 고매한 인품을 갖춘 형님들의 후광을 받아 성품이 온후하고 특히 효성이 지극하시고 붕우간(朋友間)에는 믿음으로 상교(相交)하며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인의로써 올바른 정사를 보살폈다. 고양현(高陽縣)은 한양에서 지척(咫尺)인지라 세종(世宗)임금께서도 '하군(河君)이 고양 (高陽)을 다스림과 고양현(高陽縣)이 하군을 얻음이 옛날 아닌 지금에 있었서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선생은 실직(實職)으로 종육품 벼슬인 현감(縣監)에 지나지 않았으나 증직(贈職)으로 영의정 (領議政)을 제수 받은데 대하여 의아하게 여기는 분이 계시나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증직제도 (贈職制度)는 아들이나 증손까지에 이품(二品)아상의 벼슬아치가 있어야 증직상신(贈職上申)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나 임란 후에는 이 제도 시행에 융통성이 생겨 명유(名儒), 충절신(忠節臣), 효행(孝行)이 뛰어난 효자에게도 상당한 품계(品階)를 증직한 경우가 많았는데 선생은 생전에 부모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음으로 뒷날 집안의 거유(巨儒)들이 발의(發議)하여 지역유림(地域儒林)의 인정을 받아 최고의 증직(贈職)이 수여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조(高麗朝)의 병부상서(兵部尙書)을 역임하셨던 목옹공(木翁公) 자종(自宗)께서 청주목사(淸州牧使)로 계실때 민정시찰(民政視察) 차 석화(石花)지방에 들러 그곳의 아담한 풍치에 경탄하시고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로 삼기를 마음으로 작정하셨는데 효성이 지극하신 선생이 선고(先考)의 유지(遺志)에 따라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둔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향년 69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는데 그 후예들이
오늘날 석화문중(石花門中)을 이루어 세거(世居)하고 있다. 선생의 장자 정서(呈瑞)는 사헌부 감찰 벼슬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셨고, 묘소: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환희1구 산101번지 ※그동안 충북 청원군 옥산면 환희 1구 산101번지에 모셔저 계시던 증 영상공 보(溥)선조님과 아드님이신 승정원좌승지 정서(呈瑞)선조님묘소가 있는 주위의 산이 너무 험준하고 묘사 지낼때 마다 길이 없어 일일이 길을 내어야 만 갈수 있는 그런 지역으로 후손들이 아주 어려움을 느껴 부득이 지난 2006년 9월 20일 후손들이 살고 있는 충북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 257번지로 이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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