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수(陜川郡守)공 휘 맹질(孟질)선조님의 묘소:경남 창녕군 이방면 석리 마수 마연산


하맹질(河孟질) 13세손 

창녕현감(縣監)을 역임한 하척(河滌)할아버님의 아들이다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역임했다. 공의 휘는 맹질(孟질)이요 자는 조욱(肇旭)이요 성은 하(河)씨이니 진주인(晋州人)이시다. 시조의 휘는 진(珍)인데 고려 사직(司直)이시었다. 8세를 지나 휘 즙(楫)에 이르렀는데 1347년에 원나라 정치관(整治官)으로 기 삼만(奇三萬)을 매질하여 죽게 하시어 곧다는 소문이 중국을 흔들었다. 1377년에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부국 숭록대부 진천 부원군(晉川府院君)에 봉해지셨다. 호가 송헌(松軒)이니 공(淸白吏公)의 고조부님이시다, 증조부님 휘는 윤원(允源)인데 공민왕조에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시어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시고 수도(首都)를 수복(收復)하시어 2등공신으로 녹훈(錄勳)되시었다. 신 우(辛우) 초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시어서는 등청(登廳)하실 때 마다『그른 줄을 알고도 잘못 처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이란 여덟 자를 목패에다 쓰신 것을 벽상(壁上)에 거신 연후에야 사무를 보시었다.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복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지셨는데, 호는 고헌(苦軒)이다 조부님 휘는 계종(啓宗)인데 공양왕조에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시어 포은(鄭夢周) 선생으로 더불어 글을 교류하여 상소하시어 신 돈(辛旽)의 다섯 죄를 논정(論定)하시었으나 조정이 이미 어쩌지 못할 형세에 놓여 있었으므로 드디어 외직(外職)을 청하시어 문경 군사(聞慶郡事)를 지내시다가 시(詩)를 포은(圃隱)목은(牧隱 :李穡) 두 선생에게 보내시어 속뜻을 보이시고 인하여 문을 닫고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시었다.

아버님 휘는 척(滌)이다 조선조에 벼슬하시어 1453년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이 되시었는데 대신(大臣)들이 죽임을 당함을 보시고 벼슬을 그만두시고 다스리던 고을 서쪽 내동(內洞)으로 가 사시니 창녕(昌寧)의 하씨가 공(縣監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선비(先비)께서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목은 선생 색(牧隱先生 穡)의 따님이신데 1403년에 공(淸白吏公)을 돈의문(敦義門) 밖 주동(鑄洞)에서 낳으시었다. 공께서는 어릴때부터 남달리 뛰어나시어 큰 뜻을 가지시었고 부모님을 효도로써 섬기시어 조석 문안(朝夕問安)으로부터 장사(葬事)지내는 모든 일과 제사의 예법에 이르기까지 정성과 공경을 다 갖추시었다, 문음(門음)으로 벼슬하시어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이르시었는데 부임(赴任)하시어서 유학(儒學)을 일으키시며 학문에 힘쓰시고 부역(賦役)을 덜어 민폐(民弊)를 없애시어 결백하다는 칭송을 들으시었더니 돌아오신 뒤에 고을 사람들이 생사당(生사堂)을 세워 경배(敬拜)하였다,

1463년에 세조 대왕 명으로 청백리(淸白吏)로 지정되시었다. 1491년 2월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9세였다 창녕 고을 서쪽 이방면 마연산(梨房面馬淵山) 선고의 묘 아래에 묻히시었다. 마나님 숙인(淑人)께선 한산 이씨(韓山李氏) 양도공(良度公) 숙묘(淑묘)님이 따님이시니 진안 대군 방우(鎭安大君芳雨)님의 외손이시다 묘는 공과의 합봉(合封)이다. 1남을 기르시니 휘는 주(澍)인데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이시었다 부모님을 잘 봉양하시었기로 왕께서 복호(復戶:부역을 면함)의 은전과 노비(奴婢)를 내리시었다. 휘 주(澍)께서 3남을 낳으시었는데 맏아드님 구수(龜壽)님은 현감(縣監)이시었고 둘째 맏아드님 구년(龜年)님은 전력부위(展力副尉)시었고 셋째 아드님 구령(龜齡)님은 숨어 벼슬하지 않으시었다. 구수(龜壽)님께서 3남을 낳으시었는데 부(傅)님은 진사(進士)이셨으나 세속에서 벗어나심으로 일컬어 지셨고 관(灌)님은 별제(別提)로 불리시었으나 나아가지 않으시었고 홍(泓)님께선 문과 급제로 판관(判官)이 되시어 선정(善政)으로 이름나시었다. 구년(龜年)님께선 3남 2녀를 낳으시었는데 아드님 박(珀)님께선 천거(薦擧)로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시었으며 은사(恩師)이신 김 한훤당 선생의 사위가 되시었고 정(珽)님은 부사(府使)이시었고 구(球)님은 내금위(內禁衛)이시었다 따님 한 분은 시직(侍直) 노 섭(盧섭)에게 한 분은 사인(士人)강 정숙(姜正叔)님에게 출가하시었다. 구령(龜齡)님께선 2남을 낳으시었는데 호(濩) 형(泂)두 분이 다 덕행이 있었다.

아 공의 묘갈(墓碣)이 해가 오래 되어 글자가 빠져 읽을 수 없기로 후손 태현(泰絢) 대규(大圭) 두 분이 세록(世錄)에 의거하여 유사(遺事)를 적어 대룡(大龍)님을 보내어 나에게 비문(碑文)짓기를 조르는데 내 바야흐로 병들어 선영 마을에 누워 있어 손님 응대를 못 하는 형편이라 어찌 이 조름을 감당하리요? 다만 유사(遺事)로써 음기(음記)를 삼고 이어 명(銘)을 쓰노라

대대로 이어진가업 절의에 두분이요,

훈봉에 두분이라. 절의와 훈봉의 집안 또 청백리를 보태었네

처음  합천에서 선정하사 임금 인정 받으시고

한푼도 탐내심 없고 생사당 높이 섰네.

후세 자손들도 청백으로 칭송인데 비바람에 묘비글자 알아볼길 없어.

새로 새겨 드러내니 만봉이 따라온다. 이로부터 집안에 무슨 탈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