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지선생의 묘소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충렬공 하위지(河緯地) 13세손

 

진양하씨 단계공파 시조로 알고 있는 동정공 하성(河成)이라는 분은 충렬공 諱 위지(偉地) 선조님의 7대조이신데 1828년에 발간된 무자보 족보에서 사직공 6세조이신 참지공 하의 (河義) 선조님과 같은 계대에 합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얼마전에 사직공파로 복원되었습니다  
2000년에 새로 발간한 진양하씨 사직공파 대동보에는 충렬공 諱 위지(偉地) 선조님의 후손 계보도 함께 합보되어 수록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단계공 후손들은 아직까지 통합에 반대하는 분도 몇분 있다고 합니다.
무자보(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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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 하위지 선생 유허비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형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善山邑) 완전리에 있다. 진양하씨 충렬공파 종중이 소유·관리한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110㎝, 너비 45㎝, 두께 17㎝이고, 비각은 단층 기와집이다.

譯文

선생은 휘가 위지(偉地)요 자는 천장(天章)이고 관향은 진양으로 선대부터 선산(善山)에 오시어 거주 하시었다, 고(考)의 휘는 담(澹)으로 청송(靑松)군수를 지내셨으며 고(考)의 상계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선생은 청송 관저(官邸)인 영봉리(迎鳳里)에서 생장하였다, 어렸을 때에 조그마한 서재 한 칸을 설치하여 형제가 함께 거처하면서 문을 닫고 글을 읽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1438년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에 뽑혀 있으면서 항상 경악(經幄)에 보좌 하였으며 문종조(文宗朝)에도 선생이 계속 집현전에 있으시면서 명을 받들어 여러 유신(儒臣)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셨다,노산군(魯山君:단종) 초기에 선생이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역대병요가 완성되자 세조(世祖)가 되기 전 수양대군(首陽大君)일 때 위에 아뢰어 편찬에 참여한 모든 신하에게 계급을 올려 주기를 청하여 선생은 중훈대부(中訓大夫)에서 중직대부(中直大夫)로 승급하였다.
홀로 아뢰어 이르기를 계급을 올리는 은혜를 청한 것이 아래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그 농락(籠絡)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오 하면서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므로 집의(執義)벼슬을 바꾸어 직제학(直提學)으로 삼았다,


병이 들어 나아가 보이며 말미를 얻어 온천에 목욕하고 하향하자 마침내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등이 주살(誅殺)을 당하자 조정에 돌아올 뜻이 없었다. 좌사간(左司諫)으로 부름을 받고 겨우 길에 올랐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글을 올려 마음속에 품은 것을 진술하고 이상(履霜) 포상(苞桑)의 경계를 생각하여 왕실을 더욱 강하게 하며, 권문(權門)등 은근한 뜻을 극진히 하였으니 대개 바라는 것이 간절하고 염려하는 것이 깊기 때문이다,
1455년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자 부르심에 나아가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으나 그 뜻이 있는 곳이 있어 내려준 녹봉(祿俸)을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이듬해 병자년에 김질의 고변(告變)으로 인해 성삼문,박팽년,이개,류성원,유응부 등과 같은 날에 주살(誅殺)을 당했으니 아, 슬프도다. 이것이 선생의 처음과 끝이었다. 선생의 묘가 선산부(善山府) 서편 고방산(古方山)언덕에 있는데  그의 부인 김씨와 같은 자리이다  예전에 그 묘에 작은 비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왜구가 선산부(善山府)를 점검하고 있는 동안에 부셔 버림을 면하지 못했다.

이제 선생의 외 五대손 김곤(金崑)이 비석을 다시 세우려하나 예전에 새긴 비문이 소실되어 새로이 글을 지어 새기기를 청하였다, 슬프도다 선생의 사적(事蹟)은 일월(日月)과 같아서 광채가 스스로 혁혁하니 어찌 말하기를 기대 하는가? 천지가 그것을 알고 있으니 글을 지어 남에게 보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평범한 필력으로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찬양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감히 못하겠다고 사양을 하니 즉 김군이 말하기를 앞사람이 세웠던 비석의 밑돌이 아직 있으니 복구하지 않고서는 안되겠다하여 여러번 와서 청하는 것이 더욱 간절하므로 전해들은 대로 감히 대략 서술한다.
선생의 아름다운 말씀 의연한 행실이 세상에 교훈이 될 만한 것이 어찌 한 두가지 뿐이리오마는 가문이 몰적(沒籍)하여 전해 오는 것이 없고 오직 추강(秋江)남효온(南孝溫)이 세상에 육신(六臣)의 행장(行狀)을 전할 뿐이다, 선생을 칭찬하여 이르기를「사람됨이 조용하고 과묵하여 입에서 가려내 버릴 말이 없다」하고 세종대왕이 인재를 양성하매 이 때 와서 비로소 성(盛)하게 되고 그 당시의 공론(公論)이 선생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하니 이것만으로도 족히 알 수 있다. 평소 닦은 수양에 근본이 있었기 때문에 필경 실행한 일이 이러한 큰 절의(節義)가 있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형 강지(綱地)는 선생보다 앞서 급제하였고 아우 기지(紀地)는 선생과 동방(同榜:한때에 과거에급제하여 함께 방목에 오른사람)이며 막내 아우 소지(紹地)는 생원(生員)이며, 선생의 아들은 호(琥)라 하는데 역시 생원(生員)이다. 아들 박(珀)은 화를 입어 함께 연좌되었고, 딸이 있어 이유의(李惟義)에게 시집 갔으며 이유의의 동서는 현감 김중경(金仲卿)이고, 곤(崑)은 김중경의 증손이다. 곤의 비석을 세울 때 홍공(洪公)서익(瑞翼)이 공을 군수로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고 또 묘지기 약간 명을 내주어 대대로 지키게 하였다.
또 곤(崑)의 여러 아들과 조카 네 사람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어 향화(香火)를 전(傳)하여 받들 게 하였으니 그가 비석을 도와 세우는 데에도 뜻을 두어 정성스러웠다. 비석이 세워지기는 1586년 4월 여름이다. 글을 지어 새기노니, 군자가 화변에 대처한 사업이 있으니 대개는 의리 하나만을 성취하는 것이다. 생(生)보다 욕(欲)이 더한 것이 있으므로 삶을 버릴 수가 있고 싫어하는 바가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으므로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 몸은 부월(부鉞)에 기름칠을 하여도 공(功)은 강상(綱常:삼강과 오상)에 있는 것이다. 넉자 되는 거친 무덤은 사람들로 하여금 털끝이 서게하고, 뼈가 저리게 되니 이 곳이 곧 선생이 묻히신 자리이다,

선산부사 민백남 삼가 적음
비석을 세운뒤127년 임술(壬戌)에 백남(百男)이 본부(本府)부사(副使)로 와서 묘정(廟庭)을 참배 하니 비석이 낡았고 글자가 흐려서 읽어 볼 수 없게 되었다, 삼가 다른 돌을 마련하여 옛 글을 다시 새기게하였다, 선생이 화(禍)를 당하던 날 재산을 손수 기록한 끝에 귀동(龜童)국(국)에게 보인다는 사자(四字)가 있었고 선생이 스스로 서명하셨다,
선생이 방금 죽음 보기를 집에 돌아가듯 하니 어찌 세세한 기물(器物)에 구구하게 하셨는지 이것은 선생의 막내 아우 생원의 아들인 귀동(龜童)에게 이름을 지어주시고 후사를 맡겨 놓은 것이다, 선생 형제의 이름은 원래 석(石)자 변에 쓴 글자로 이름을 지었는데. 큰 화변 뒤에 그대로 국(국)이라 할 수가 없어서 곧 원(源)자로 다시 고치고 선생의 제사를 받들어 왔다,
숙종(肅宗)무인년에 육신(六臣)들의 관작(官爵)을 복직 시키고 을유년에 연신(延臣)의 말로 인해 원(源)으로써 뒤를 잇게하였는데 원(源)의 아들은 자징(自澄) 자홍(自洪)이요, 손자는 철곤(徹崑) 철민(徹岷)이다 지금 십여대에 이르기까지 후손이 매우 번성하다


금상 기미년에 선생의 부자와 형제의 관작을 다 복직시키니 선생의 아버지는 평안도(平安道) 경력(經歷)에 복직 되었다, 하씨 세보(世譜)에 상고해 보면 선생의 중조(中祖)인 성(成)은 벼슬이 주부동정(主簿同正)이고 사대(四代)를 전(傳)하여 윤(胤) 지백(之伯)이라 이름한 분이 선생의 증조부(曾祖父) 및 조부(祖父)이다,
비문(碑文)중에는 조부 이상은 기록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외손(外孫)이 자세히 전해 듣지 못해 그렇게 된일이다 이어 그 후손 용익(龍翼)의 말에 의해 함께 기록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참고할 바가 있도록 했다.1698년 비로소 글을 올려 장릉(莊陵)이라 휘호(徽號)하여 치욕스런 죽음이라는 오명을 씻게 되니 이에 여러 신하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특별히 증직(贈職)하였다,
이를 꾀하여 공의 재실을 더욱 크게 하고 왕실을 더욱 강하게 하며 세도를 더욱 막으며  혐의 스러운 일을 더욱 막으며 붕당(朋黨)에 아부하는 것을 더욱 근절시키기를 청하였다. 또 축원하기를「오늘날 보정대신(輔政大臣)의 책임자는 임금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도리를 더욱 극진히 하여 임금의 기체가 날마다 건강하고 임금의 덕이 날마다 성취되어 조속한 시일 내에 만가지 정사를 친히 하시어 온 백성의 희망을 위로해 주시며 전하께서는 또한 마땅히 성례(聖禮)를 넓히시어 바른 말을 받아 들여 지사의 기운을 넓혀 주시고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어 덕성을 높이시어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 하시며 보정대신을 중히 여기시어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문종황고(文宗皇考)의 소망을 위로하셔야 할 것이고  스스로 겸손하기만 하여 내 어린 사람이 무엇을 감히 하리오 하시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광묘(光廟)가 선위(禪位)를 받자 교서로써 나오기를 더욱 청하였다, 위지(緯地)가 부르심에 나아가니 예조참판(禮曹參判)의 벼슬을 내리고 매우 사랑하셨다,

상왕(上王:단종이 선위한 뒤에 상왕이라 칭함)의 연세가 어려서 선위한 것을 안타까워 하고 그 녹을 먹는 것이 부끄러워 참판이 된 뒤부터는 그 녹(祿)을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병자년 사변에 이르러서 낙형(烙刑)으로 성삼문 등을 고문하고 다음에 위지에게 이르기를「대체 사람이 반역의 이름이 있으면 보통 귀양가는 것 뿐만 아니니 무슨 죄를 또 물을 것이 있는가? 이미 반역이란 이름을 씌웠으면 그 죄는 의당 주살(誅殺)이니 다시 무엇을 묻는가?」하니 상(上:世祖)이 노함이 풀려 낙형만은 하지 않았다. 성삼문 등과 함께 모의하여 같은 날에 죽었다,

세종께서 인재를 양성하여 문종 때에 이르러 크게 성하였다, 그 당시 인물을 논함에 위지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하위지(河緯地)의 자는 천장(天章)으로 1438년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부찬사가독서(副撰賜暇讀書)의 벼슬이 내려졌다, 세종조(世宗朝)에 박인수(朴仁受) 성근보(成謹甫) 유태초(柳太初), 이백고(李伯高) 하천장(河天章) 모두는 하 세대의 동배(同輩)로서 이름을 날리고 모두가 박인수를 추대하여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용齋叢話)를 집대성(集大成)하였다.

 전(傳)하는 선생(先生)의 시(詩)가 있다.
박인수 팽년이 도롱이를 빌려달라는 데 화답하다
 (謝人贈蓑衣)사인증사의
    
   男兒得失古猶今
   남아득실고유금
   頭上分明白日臨
   두상분명백일임
   持贈蓑衣鷹有意
   지증사의응유의
   江湖烟雨好相尋
   강호연우호상심

 
역문(譯文)
도통이를 보낸 준 것에 감사함

"사나이의 득실을 고금이 다룰게 없고
 머리위엔 분명이 해가 비치고 있는데
 도통이를 보내준 뜻 어찌 몰겠는가
 강호에 묻혀 조용히 살라는 그 참뜻을".

아래의시는 문종2년 겨울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공이 전라도로 낙향 하때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하위지선생께서 써주신 시문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丈夫出處古來難  
     喜覩先生早掛冠  
     疏傳乞骸知止足  
     樂天知命愛淸閑  
     十年魚鳥親如舊  
     三逕兒童候己歡  
     從此不?林下見  
     況今淸譽滿朝端
 有美辭送崔先生 河緯池

"대장부 물러남은 옛적부터 어려운데
선생의 결단을 기쁘게 보는 구나
옛날 소광은 물러 날 줄 알았고
그대는 낙천하여 천명을 알고 맑은 한가로움을 사랑하는 도다.
십년 자연이 옛날처럼 친근한데  
길거리의 아이들도 기쁘게 반겨 기다리네
이제 시골에서 만난들 부끄러움이 없는데
하물며 그 명예야 조야에 가득한 것을". 

아름다운 글로 최선생을 보낸다. 하위지 

노생원에게 주다(贈盧生員)

성의 서쪽 노씨네 집
축대 위 풍경이 별천지로구나.
푸른 소나무 흰눈 동창문 밖에서
북으로 서울을 바라본 지가 몇 해이런가.

송별이수(送別二首)

뇌석변두리에 저냑 햇빛이 밝은데
부자가 헤어짐을 당해서 이별의 정을 말한다.
한수의 시를 차마 읽지 못하겠구나.
포구를 만들어 뒷사람에게 나의 정성을 보이리라
장막 안 손님이 동시에 선령이라
예로부터 조정에서 북방을 중히 여기었네.
십분으로 노력하여 기묘한 계책으로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동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하지 말게 하여라.

무제(無題)

의리의 군대와 선비들이 구름같이 일어나
위태로움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적은 정성이나마 바치려한다.
서릿발이 칼날에 어리는 곳에는 영웅의 도모를 운전하고.
눈속에 소포를 펴낼 때에는 묘한 기술을 다투도다.
천리밖의 절충 하는 것은 행검의 용맹이요,
일장의 담소는 포진의 정이라.
다시 도독염공의 아망을 보니
도적의 간담의 대범의 이름에 놀랄 것이다.

 

서강중 거정 형제를 보내어 영친하러 대구에 돌아가다
(대동시림에 나왔음)

한집안 문관 무관 이름이 향기롭다
형은 집금오요 아우는 옥당이라
학발인 북당에는 효성으로 봉양할 것이요.
금의는 남쪽나라에 이미 영광스러우리라
영원(영원)에 앞 뒤를 하니 그대가 참으로 부러우나
형수(刑樹)가 어긋났으니 내가 홀로 슬퍼하노라.
월파정(月波亭)아랫길에 머리를 돌려보니
산에 가득한 송백(松柏)이 울창하도다.

 

두천사를 전송하다 두수

예시랑(倪侍郞)을 전송한 것.

여섯용이 멍에하여 해바퀴를 부축하니
대명이 혁혁하게 푸른 하늘에 달려 있다
명당(明堂)을 열고 따뜻한 봄과 같은 은혜를 펴기 위하여
붉은 조서가 밤에 봉래궁에서 내리었다.
옥당에 학사가 성초를 멍에하여
멀리 멀리 동쪽하늘을 지향하였구나,
학 들판날으는 눈에 모피옷을 껴입고.
압록강 가는 물멸에 난주를 띄웠구나.
계림과 곡령이 눈에 들어오니
삼신산이 금자라 머리에 뜨락 잠기락한다
빨리 몰아서 험한 길을 경과하니
장하도다 활과 살로 기도한 뜻을 깊이 생각하였다.
무지개깃발 날개일산이 앞길을 인도하니
비단도포와 옥 깃발이 서로 빛나구나
삼한 사람들이 함께 영주신선을 알 게 되어
상쾌하게도 상서로운 기린과 큰 별을 보는 듯하였다.
손에 조서를 받들고 와서 선포하는데
돌음돌이에 예식이 틀림 없으며
종용스런 응답은 의기가 떨치고.
문장은 예사인데도 다 신기한 경계에 들어갔도다.
담소에는 종횡으로 무지개를 토하듯하고.
흉금은 뇌락하여 성신을 나열하듯하고
기이한 광채가 만길이나 길어서
글귀가 입에 나와 자주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풍월을 거두어 비단 주머니 속에 잡아 넣으려
이 넓은 천지에 돌아다니게 되었다.
우리 작은 나라는 궁벽하고 볼 것 없어
오래도록 머물기 어려워 총총하게도 수레바퀴를 돌리는구나,
봄바람은 태액지에 불어들고
상서구름은 단봉투를 옹호하였네.
그대 돌아가 임금의 은총을 받들고 녹명을 노래할 때는
상원에 꽃이 활짝피고
꾀꼬리 우는 소리 들리네.
그대는 보게 바다위 반도나무를
천년만에 한번씩 열매가 열어
서리와 이슬에 익었으니 따다가 금반에 담아 지존 에게 드리어 만세가 되도록 팔짱끼고
우리 동방의 나라를 덮어주게 하소.
나에게 큰 고치가 부상에서 나올 것이 있으니 오색이 찬란하여 무늬가 되어있다,
그대에거 드리노니 순임금 의상에 수를 놓아서
사해로 하여금 빛나게 하소


사마급사중(司馬給事中)을 전송한 것

속수연원이 길이 세상에 전해 와서
물결이 흘러흘러 대대로 어진 사람이 났구나,
궁전 안에 홀로 종횡(從橫)한 글씨로 대답하고
머리위에는 천히 지척하늘을 쳐다 보앗네.
나라에 바치는 충성은 본디 절개를 가졌고
집에 전해온 예법은 청전(靑氈)을 보수하였네.
이제 서로 만나 이내 서로 이별하게 되니
가는 행색을 바라보고 슬퍼하노라

 

희롱삼아 시 한구를 지어 처사인 사에게 올리다

한번 예쁜 사름을 이별하기 끝내 아득하였으니
영남과 호남의 길이 삼천리나 되는데
어찌 하는고 이때 마음속 일을 말할 수 있는가
응당 열폭이 넘는 편전지를 허비하리라

(이 시는 손수 쓰신 글씨로서 김원사(金院事)한계(漢啓)의 후손인 상열(相說)의 집에서 얻었다.)

 

 사육신 (死六臣)이란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惡刑)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6총신으로서 곧 성삼문(成三問:承旨) ·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 ·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 ·이개(李塏:直提學) ·유응부(兪應孚:中樞院同知事) ·유성원(柳誠源:司藝) 등을 말한다.
이들은 전에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으로부터는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사람들로서,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3공(公)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使臣)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화로 세조(수양대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綢)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음모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성삼문 ·박팽년 · 응부 ·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으로 처형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또한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김문기(金文起) ·권자신(權自愼)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단계선생 계후사(繼後事)(養子)교지(敎旨)

1705년 12월6일에 예조판서 민진후 병조판서 유득일 강화유수 민진원 등이 임금님과 면대하기를 청하여 임금을 모시고 말을 할 때에 민진후가 아뢰기를「옛 사간(司諫) 하위지(河緯地)에 대하여 원통함을 풀고 관작을 복직시킨 것은 실로 장한 일이라 듣는 이로서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한가지 일이 있어 감히 아뢰옵니다.
위지(緯地)가 그의 두 아들이 연좌되어 죽을 것을 알고 그 아우 소지(紹地)의 아들 귀동(龜童)이란 사람으로 뒤를 이으려고 옥중에 있으면서 가장집물을 종이조각에 차례로 기록하고 그 밑에 귀동(龜童) 및 국(국)을 쓴 다음에 서명하였으니 이것이 국(국)자를 귀동의 관명(冠名)으로 하고 그 뒤를 잇게 하여 성문(成文)같이 되었습니다.

위지의 처 김씨(金氏)가 귀둥이를 그외가에 부탁하여 여러번 위태로운 경우를 지나 근근이 화를 면하였습니다. 귀동의 형제가 다 석(石)자 옆에 글자를 붙여 이름을 지었으나 조심하는 까닭에 감히 국(국)자로 시행하지 못하고 다시 원(源)자로 개명하여 위지의 제사를 받들어 왔습니다.
위지의 무덤이 선산(善山)에 있는데 지금 8, 9대를 내려오도록 향화(香火)를 끊이지 않았으니 이미 뒤를 이은 일에 명백한 증거가 있으므로 자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 대신(大臣)들이 을사명신 김저(金저)의 뒤를 세우기를 아뢰니 상감께서 뒤를 세워주셨습니다. 금번 하위지(河緯地)의 일이 꼭 같은 일이니 나라에서 대우할 바가 특별하여야 될 것 같습니다.
대수의 원근을 막론하고 특히 은혜로써 하원(河源)을 위지의 양자로 만들어 주시면 성덕에 더욱 빛나옵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육신(六臣)은 다른 사람과 특별하게 다른 것이 있으니 어찌 뒤를 이어 주지 않겠는가? 아뢰는 바에 의해서 특별히 시행하라」하였다.

 

  단계선생 불조사(不조事)교지(敎旨)

1804년(甲子) 3월 28일에 소대입시(昭對入侍)할 때에 좌승지 홍의호(洪義浩)가 아뢰기를「충열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는 곧 장릉(莊陵) 육신(六臣)중의 한 사람으로 정성스런 충심과 탁월한 절개가 우주사이로 뻗쳐있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듣자하니 그가 절개에 몸을 바치던날에 손수 글을 써서 후사를 그의 조카인 원(源)에게 부탁하여 영남에 숨어 있는 까닭으로 대대로 향화(香火)는 받들어 8,9대까지 끊어지지 않았으나 감히 드러내놓고 자손이라고 하지 못하다가 숙종  때 와서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가 경연에서 그 일을 아뢰어 특별히 하원(河源)을 명하여 뒤를 잇게 해서 끊어진 대를 잇는 의리에 맞추었고 영조 경인년에 시호를 그 집에 내려주었으며 선대왕 때 그 집에 정려(정閭)하고 장릉에 배향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여러 조정에서 높히고 장려한 일이 극진하였습니다.

그의 자손으로 하여금 의리를 기초로 하여 예를 새로 만들어 사판(祠版)을 임시 권도로서 별묘에 모시게 하였으나 아직까지 부조(不조)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다 하오니 밝은 세대에 힘이 될까합니다. 이전에 충문공 성삼문(成三門)의 사판이 인왕산 밑에서 나와 조정에서 노은서원(魯隱書院)에 봉안하게 하고 충정공 박팽년(朴彭年)의  예에 의하여 또한 부조(不조)의 은혜로써 영화롭게 하여주었으니 이번에 충렬공(忠烈公)의 사판(祠版)도 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물어 보시고 일체의 예식을 베풀어 주신다면 충절을 표창하고 풍성을 세우는 도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씀하기를「당청(내시)을 보내 대신에게 문의하라」좌상(左相) 김관주(金觀柱)가 말하기를「부조(不조)는 특별한 은혜이며 성대한 예식이라 아래서 감히 바로 철폐할 수 없는 것이요 위에서도 마땅히 가볍게 베풀 것이 아니오니 충열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는 그 크고 큰 충성과 높고 높은 절개가 일월과 광채를 다툴 만하여 여러 조정에서 애달프게 여기고 표창한 바가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성삼문 박팽년에게 이미 베풀어 준 예가 있으니 일체로 다 허락에 주는 것이 실로 풍성을 수립하고 세상을 맑게 하는 정치에 합당하옵니다」하니 전교하시기를 「대신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하였다.

 

좌사간을 사직하는 상소

계유(癸酉)년 단종 원년(1453) 시월달 계사(癸巳)일에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우찬성(右贊成) 이양(李樣) 이조판서(吏曹判書) 민신(민伸) 병조판서(兵曹判書) 조극관(趙克寬) 군기판사(軍器判事)윤처공(尹處恭) 선공부정(鐥工副正) 이명민(李命敏)등을 베어 죽였다. 수일 뒤에 선생을 명령하여 올라오라고 하면서 말씀하기를 지난번 면대하기를 청할 때에 내가 면대하여 듣고 싶어 하였으나 권세가진 간사한 신하의 조해한 바가 되어서 즉시보지 못하였고, 너도 또한 병으로 해서 내려가게 되었다.
이제는 권세 가진 간사한 무리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실로 정치기강을 다시 시작하는 초기라 너를 사간벼슬을 시키니 병을 억제 하고 곹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십일월 병진(丙辰)에 전 사헌부 집의(前司憲府執義) 하위지(河緯地)는 황송하옵게 죽음을 무릅쓰고 주상전하께 말씀을 올리나이다.신은 질병이 잇달아 오래도록 회복이 되지 않았는데. 조정으로 돌아 오라는 특별하신 명령을 받고서도 가지 못하여 대궐을 생각하는 마음만이 간절할 뿐이 었습니다,
시월달 이십일에 또 좌사간관직에 올려 주시고 정사를 다시 시작하시는 뜻을 일러 주시고 병을 참고 길을 떠나라 하시니 성상의 훈시가 통절하시어 읽어보고 감개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위고 병든 몸이 길을 달리지 못할 것을 요량해서 가지 못하고 한번이나마 천안(天顔: 임금의 안색)을 우러러 뵈옵고 억울한 소회를 조금편 뒤에 천천히 글해 하기를 도모하려고 힘을 억지로 하여 즉시 출발하였더니 불행하게도 길을떠난 날에 찬 바람을 마시어 옛 증세가 더 극심하여 전신이 떨리고 고통스러워 아무리 약을 먹고 치료를 하였으나 아직도 낫는 길로 들어서지 않아서 힘이 다 되고 기운이 줄고 쇠약하여 찬 것 이 두려워 문밖에 나가 바람을 쐴 수가 없습니다.
허리와 팔에 마비가 더하고 잡증세가 병발하여 거의 일개월이 되었으나 더하기만 하고 낫지는 아니하니 비록 병을 억지하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신음하면서 대궐을 생각하여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주상전하께서 신의 병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깊이 새로 명령을 하시면 지극한 소원이오며 떨리고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초야에 미천한 자로서 여려 조정에 은혜를 매우 깊이 입어서 항상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만분의 일이나마 갚으려고 생각하였던 바 또 주상이 비록 혼미하고 졸렬하지마는 어찌 감히 흥기 분발하여 조금이라도 평소에 먹은 뜻을 갚으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운명이 궁하고 신수가 기괴하여 질병에 묶이고 심사가 낭패되어서 부끄러운 말씀으로 성상의 은혜를 저바리오니 만번 죽어도 죄가 남겠읍니다.신은 간절히 생각하오니 근일의 사변은 역사에 드문일입니다. 혹은 유명을 받은 보정대신이요 혹은 가까운 친속인 숙부(叔父)로서 다같이 나라와 더불어 즐겁고 슬픔을 함께 하여야  될 처지인데 무모 하기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심하니 이것은 실로 우리 동방 천만세에 씻지 못할 수치이온 바,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라 어쩔 수가 없으니 논한들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대개 천하에 걱정으로는 사람들이 알면서도 말을 감히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아는 자로 하여금 말을 다 하게 되고 임금이 그 말을 얻어들어서 친히 처리를 하게 되면 무슨 걱정인들 미연에 방지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근일의 일이 곧 이것입니다.

사세가 이미 커진 뒤에 다행하게 제거 하였으나 그로 인해서 상한 일도 또한 많습니다. 또는 권세잡은 간신을 제거하는 것이 자고로 어려운 일이요, 그 뒤를 이어서 하는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다시 시작하는 초기에 있어서 마땅히 할 바는 깊이 생각하시며 지난일을 돌아봐서 널리 도모하시고 자세하게 계획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이라도 할까말까 하여 구차스레 말고, 무엇이 상할 것이 있으며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고 하시지 말며 너무 늦추어서 일에 기회를 잃어 버리지 말으시고 너무 급박한데 지나쳐 대체를 손상하시지 말으시고, 너무 관용하여 조정기강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도록 말으시고 너무 명렬하게 하여 나라 명맥이 혹이라도 상하지 말 게 하시며 전공에 물들어 후회를 끼치지 말으시고 소회가 있는 자로 하여금 말을 다하기를 두려워하지 말 게 하여 임금의 세력에 구속 받은  바가 있으서 위 아래가 막히게 하지 말으소서.

그리고 다시 이상포상의 경계를 생각하시어 공실을 더욱 강하게 하시고 내정을 다스림에 더욱엄하게 하시며 권세길을 막아서 혐의쩍은 일일을 제거 하시고, 봉당으로 아부하는 징조를 근절하시어 무릇 시설하시는 일에 있어서 인심에 맞도록 하시며 법전에 합하도록 힘써서 오래 가도 폐가 없이 하시고 길거리와 초야에 사람들로 하여금 저희들끼리 숙덕공론하는일이 없게 하소서. 신은 병을 안고 강호에 누워 있으면서 신극을 멀리 바라 보고 오늘날에 무슨일이 가장 급하며 무슨일이말할 만한 일인지 알지 못하오니 성상의 은덕을 저바림이 부끄럽습니다.
신이 힘으로는 이미 어찌할 수가 없고, 다만 밤 낮으로 눈물만 흘리고 천지와 귀신을 불러 묵묵히 마음 속으로 빌기를 원하노니 오늘날에 정치를 보좌할 책임을 맡은자는 더욱 임금을 보필하여 성상의 몸이 날마다 건강하고 성상의 학문이 날마다 나아가며 성상의 덕이 날마다 이루어 지게 하여서 속히 만가지나 되는 정사를 친히 하시어 우리 동방에 백억만 백성들이 밤 낮으로 우러러 바라보는 마음에 맞추어 주시며 안으로 궁중으로부터 밖으로 사방까지 모두가 안정하여 조금이라도 동요되는 마음이 없게 하여 태조대왕 태종대왕 세종대왕 문종대왕의 전통이 영원히 반석같이 편안하고 산천귀신도 기뻐하지 않음이 없게 하여 달라는 것 뿐입니다.

전하께서도 귀를 열어서 정직한 공론을 받아들이어 지사들의 기운을 넓혀 주시고 다시 종묘와 사직을 위해서 더욱 몸을 삼가시고 부지런히 경연에 나시어 덕성을 높게 하고 아직 싹트지 않은 사사욕심을 미연에 방비하여 항상 청명한 기운이 몸에 있도록 하옵시오. 마음을 밝히어서 간악한자를 비쳐보시고 마음을 바로하여 사특한 자를 막으시며 뼈다귀같이 빳빳한 신하를 가까이 하시고 참소하고 간사한 신하는 멀리 하시며 정치를 보좌하는 대신들을 존중하게 대우하시고 행동을 반드시 예법에 말미암아 하시어 이와 같은 어려운 시기를 건너가 문종황고(文宗皇考)께서 내가 닦아 놓은 터전을 버리지나 않을까 하시는 희망을 위로하실 것이요, 다만 스스로 겸사하여서 내 어린이가 무엇을 감히 하리요 하지마옵소서 신이 은혜를 받음이 가장 깊은 자로서 이런 기회를 만나서 병으로 인하여 힘을 베풀며 절개를 바치지 못하고 다만 억울한 소회를 품고 병상에 누워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약으로 사는 남은 목숨이 마음이 착잡하고 요란하여 말할바를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신의 사정을 살피시고 신이 한가롭게 병든 몸을 수영하도록 허락해 주시면 다시 살려주시는 은혜를 입어 목을 떼놓고 보답할 날을 기약합니다. 신은 황공하여 떨리는 것을 이기지 못하여서 엎드려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말씀을 올리나이다.
하위지(河緯地)

숙종 31년 을유(1705, 강희 44) 12월 6일(병신) 
 

예조 판서 민진후가 고묘(告廟)와 진하(陳賀)를 거행하기를 청하다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청대(請對)하여 고묘(告廟)와 진하(陳賀)를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올해에는 진하가 잦았다. 내가 어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민진후와 입시(入侍)한 신하들이 같은 목소리로 힘껏 청하니, 임금이 애써 윤허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고(故) 사간(司諫) 하위지(河緯池)는 신원(伸寃)되고 복관(復官)되었으나, 다만 하위지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아우 하소지(河紹池)의 아들로서 아명(兒名)이 귀동(龜童)이라는 자를 후사(後嗣)로 삼으려고 옥중에 있을 때 종이에다 써서 집에 두게 하였는데, 그 아래에 귀동과 곽자를 쓰고 이어서 서압(署押)을 두었으니, 대개 곽 자를 귀동의 관명(冠名)으로 삼으려고 성문(成文)하였을 듯합니다.
그러나 화를 당한 뒤에 그 집에서 감히 후사를 잇지 못하고, 하위지의 아내 김씨(金氏)가 귀동을 그 외가에 맡겨서 겨우 화를 면하였습니다. 귀동의 형제 항렬은 다 돌 석(石) 자 변으로 이름짓기를 두려워하였으므로, 감히 곽 자를 이름으로 삼지 못하고, 원(源) 자로 고쳐서 하위지의 제사를 받들었으나, 이미 후사를 이은 일이 없으니, 자손이라 칭하지도 못한다 합니다.
만약 특별한 은전(恩典)으로 하원을 하위지의 후사로 삼는다면 성덕(聖德)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신이 그 문적(文跡)을 보고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기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육신(六臣)은 다른 경우와 구별이 있으니, 어찌
계절(繼絶)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특별히 시행하라.”하였다.

살펴보건대, 육신은 오직 박팽년(朴彭年)만 후사가 있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들은 바가 없다. 이제 거의 3백 년이나 지난 뒤 갑자기 그때에 계절한 일이 있다 하니, 참으로 그렇다면, 아조(我朝) 중엽 이후로 육신에 대하여 포상(褒賞)하는 등의 일에 원래 신금(申禁)하는 영(令)이 없었고 박팽년의 자손은 대대로 거두어 등용하는 은전을 입었는데,
하씨만이 어찌 어리석고 어두워 소견이 없었기에 오늘에야 비로소 나왔단 말인가?
이것도 이미 의심스럽고, 또 그 이른바 서압한 종이라는 것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결코 유식한 사람의 표지(標識) 같지 않으니, 더욱 의거하여 믿을 수 없다. 아마도 민진후가 의리를 권장하는 데 생각이 도타운 나머지 진위를 깊이 살필 겨를도 없이 이렇게 아뢴 것이 아니겠는가?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나, 흉년에 소요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우선 철폐하고, 대신(大臣)이 등대(登對)하기를 기다려 아주 철폐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廳)은 철폐하고 문서는 비국(備局)으로 옮겨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0 집 18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가족-가족(家族)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주D-001]계절(繼絶) : 후사가 끊어진 것을 이음.

 

충렬공 하위지 선조님의 사손에 대해 망언한 이면주를 처벌할 것 등을 청하는 박해철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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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2년 을사(1905, 광무 9) 3월 22일(을미, 양력 4월 26일) 맑음  좌목  
○ 종2품 박해철(朴海哲)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미천한 품성과 쓸모없는 재주를 지니고 시골에 살고 있는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골고루 베풀어 주는 우로(雨露)의 은택을 입고서 성인이 양성해 주는 교화를 노래하고 나라가 끝없이 이어져 보존되는 아름다움을 흠송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면주(李冕宙) 등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문을 보니 하늘을 속이고 해를 무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이 떨리게 하는 것으로 의리상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와서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신들의 선조(先祖)인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은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柳應孚) 다섯 신하와 병자년(1456, 세조2)의 화를 같이 입었으므로, 신들이 다섯 신하에 대해 선조처럼 제사 지내 왔으며, 혹 다섯 신하의 의리와 관계가 있다면 반드시 앞장서서 부월(斧鉞)의 주벌을 피하지 않고 명백하게 변론을 펼치고야 말 것입니다. 충정공의 현손(玄孫)인 참봉 박계창(朴繼昌)이 일찍이 충정공의 기일(忌日)을 만나 다섯 신하가 모두 왕림하는 꿈을 꾸었는데 제사가 없어진다는 말이 나오자 심히 서글픈 안색을 띠었다고 합니다. 꿈을 깨고서도 슬픈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다섯 신하를 모두 제사하였는데, 관작(官爵)이 아직 회복되기 전이라서 지방(紙?)과 축문(祝文)의 서식에 직함(職銜)을 감히 쓰지 못하고 단지 관향(貫鄕)과 성(姓) 아무개 선생이라고만 썼습니다.
그때 충렬공(忠烈公) 하위지에 대해서는 ‘단계(丹溪) 하 선생(河先生)’이라고 썼는데, 그때는 당시와 그다지 머지않은 시기였으니 반드시 명백한 근거가 있었기에 그렇게 썼을 것입니다. 150여 년 동안 제사를 받들어 오다가 명예가 회복된 뒤로는 각처에 서원(書院)이 건립됨에 따라 유생들의 논의로 마침내 제사를 그만두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온 나라에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들의 선조인 주부(主簿) 박종우(朴宗祐)와 익찬(翊贊) 박숭고(朴崇古)가 일찍이 소지(小識)를 지었는데 하 선생은 관향이 단계라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모두 신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충렬공 유묵(遺墨)에 친필로 단계라고 쓰여 있는데, 혹 별호(別號)로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가 명(明) 나라 사신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을 전송하는 시(詩)에 충정공(忠正公), 충문공(忠文公) 성삼문 등 27인과 함께 각각 관향을 썼는데, 충정공은 평양(平陽)이라고 하였으니 평양은 바로 순천(順天)의 고호(古號)이고, 충문공은 창녕(昌寧)이라고 하였고, 고 상신(相臣) 하연(河演)은 진양(晉陽)이라고 하였고, 충렬공은 단계라고 한 기록이 중국의 《요해편(遼海編)》과 우리나라의 《황화집(皇華集)》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또 삼가 살펴보건대, 충문공의 유집(遺集)에는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 적촌(赤村) 하위지와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었다.’ 하였는데 적촌은 바로 단계의 고호입니다. 그들이 각각 관향을 쓸 때에 충렬공만이 어찌 호(號)를 썼겠습니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단성현(丹城縣)의 고호는 적촌과 단계라고 한 것이 있고 단성(丹城)의 각성(各姓)을 기록한 것 가운데 하나의 하씨(河氏)가 있는데 ‘하’ 자 아래에 진주(晉州)라고 분주(分註)하였으니, 이는 진주를 본관으로 하면서 단계에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아래 단계의 각성을 기록한 것 가운데 또 하나의 하씨가 있는데 분주는 없으니, 이는 단계를 본관으로 한 것인데 바로 충렬공의 하씨인 것입니다.

숙묘조(肅廟朝)에 낙빈서원(洛濱書院)과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창건할 때에도 육신(六臣)의 관향을 썼는데 단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충렬공에게 호가 없다는 것은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유집에 소상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모두 예전부터 있었던 증거이고 하씨에 대한 시빗거리로 삼아 꾸며 낸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하용익(河龍翼)이 대를 이을 때에는 관향이 단계냐 진주냐 하는 시비가 처음부터 없었으니, 그렇다면 하씨로 대를 이을 줄만 알았을 뿐입니다.
하시철(河始澈)의 변무(辨誣)가 있게 되자 비로소 하용익이 진주 하씨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이미 드러내 밝힌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바로잡지 못했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답답해하고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시철이 《변무록(辨誣錄)》을 간행할 때에 신들의 일족(一族)이 온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고(故) 참판 박광석(朴光錫), 이조 참의 박문현(朴文鉉), 동돈녕부사 박해조(朴海朝), 교리 박해순(朴海淳)이 《변무록》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지어서 뒷날 증빙하는 기록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신들이 충렬공과 관련된 사실에 있어서 비록 한두 마디의 짧은 말이라 하더라도 만약 억견(臆見)으로 거짓 꾸며 낸 것이 있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선조 앞에 서겠습니까.

지난번 계묘년(1903, 고종40)에 삼가 황상 폐하께서 특별히 크나큰 은혜를 실시하여 다섯 신하에게 대를 잇게 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만, 장례원 경 이용직(李容稙)이 하씨 관향의 일로 신들의 종손(宗孫) 박노학(朴魯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박노학은 단계라고 여겨 대답하였던 것인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애증(愛憎)의 감정이 들어간 말이 있었겠습니까. 예식원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주품하였고 하구용(河九鎔)으로 대를 잇게 한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바로 조정에서 내린 처분으로 신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대를 잇는 것은 하씨에만이 아니라 그 나머지 네 집안에도 관련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 저 이면주의 상소에, ‘하상기(河相驥)가 박노학의 근거 없는 말을 증거로 삼아 온 나라가 외우고 있는 호를 가지고 온 나라에 없는 관향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하였으니, 그 거짓을 꾸며 무고한 것이 끝이 없습니다.
그는 학문이 보잘것없는 사람이거늘 한쪽의 설만을 근거로 삼아 이렇게 큰 차이가 있게 한단 말입니까. 채 반도 보기 전에 머리카락이 치솟더니 곧이어 너무도 죄송스러워 진땀을 흘렸습니다. 수백 년 동안 대대로 전해지는 문적(文蹟)인데 어찌 근거 없다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충렬공에게 없던 호를 가지고 온 나라가 외우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동국여지승람》에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는 관향을 가지고 온 나라에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저들이 비록 《홍재전서》의 말을 중요하게 여겨 근거를 대지만 《홍재전서》에 달린 주(註)에, ‘하씨가승(河氏家乘)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니 특서(特書)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씨가승은 하석중(河錫中)이 꾸며서 바친 그들의 가승인 것입니다.

충렬공에게는 원래네 아들 하련(河璉), 하반(河班), 하호(河琥), 하박(河珀)이 있어 모두를 동학사(東鶴寺)에 배향하였는데 광묘(光廟)의 처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석중이 심지어 배향되어 있는 하련과 하반을 빼 달라는 청이 있었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아, 통탄스럽습니다. 이에 진주 하씨라는 것이 무안(誣案)임이 더욱 드러났는데도 지금 저 이면주의 무리들이 상세히 살펴보지도 않고서 사당(私黨)의 비루한 폐습을 가지고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리고 성상을 현혹시켰으니, 어찌 한심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하상기가 증거로 삼은 것은 스스로 증거로 삼은 것으로서, 남이 증거로 삼는 것을 우려하여 감히 충렬공의 관향과 호를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주 하씨가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스스로 한스럽게 여기는 것으로서, 남이 한스럽게 여기는 것을 우려하여 감히 충렬공의 관향과 호를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변론하고자 하는 것은 관향과 호에 관한 것이고,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대를 잇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처분을 내리심으로써 이면주 무리가망언을 한 죄를 다스리시어 충렬공의 변욕(變辱)을 쾌히 씻어 주신다면 너무도 다행이겠습니다. ……”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예식원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