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좌랑공 하제명(河悌明)선조님가묘 오른쪽 아드님 하중호(河仲浩)선조님의 가묘

하제명(河悌明) 13세손


선조 초기 세종. 문종 시대에 나라를 빛낸 명정승들이 때를 맞추어 배출하였는데 문효공(文孝公)하연(河演)선생이 그 한분이니, 세상에서 칭송하는 경재(敬齋)선생이시다,
선생께서 어진 아드님을 두었으니 휘는 제명(悌明)이요 자는 덕생(德生)이요 호는 성재(誠齋)이다.진양하씨는 시조이신 고려 사직(司直)공 휘 진(珍)으로부터 시작되어 울연(蔚然)히 국중의 거족이 되었는데 진천부원군 원정공 송헌(松軒)선생은  휘가 집(楫)이요 진산부원군 고헌공(苦軒公) 휘 윤원(允源)선조님과 병조판서 목옹(木翁)공 휘 자종(自宗)할아버님이 공의 고조,증조.조부님이시다,
어머님 정경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개성부윤(開城府尹)존성(存性)의 따님이시다. 공께서 1411년에 서울 돈의문(敦義門) 밖에서 출생하신 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재주와 지혜가 풍부하여, 벼슬이 예조좌랑에 이르셨다,

1433년에 의영고 직장(義盈庫 直長)에 제수(除授)되니, 정승 허주(許주)가 자주 그 재기(才器)를 칭찬하여 시로써 축하하였으므로, 문효공꼐서 사례하여 이르시기를 「뱁새가 때를 못 만나 깊은 숲에 깃들이어 아쉬웠더니 봄바람이 화창하게 뭇 나무를  어루만지니 날개 펴고 훨훨 날아 앉을 가지 얻었네」라 하셨다
1441년에 돈녕부 직장(敦寧府 直長)에 제수되었는데 조정 신하 중에 하씨 문벌의 번성함을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 여러번 상피(相避)의 법으로써 헐뜯으므로 문효공이 임금님께 아뢰기를 「신(臣)의 자질들로 벼슬하는 자는 아우 결(潔)과 아들 제명(悌明) 뿐이온데 결(潔)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결코 상피(相避)의 법에걸릴 것이 없사옵고 제명(悌明)은 의친(懿親)이어서 승진하지 못하고 겨우 七품에 머물러 있을 뿐이로소이다」하셨으니 아마도 이는 공이 소헌왕후(昭憲王后)심씨의 당질서(堂姪서)였기 때문이다,
1443년에 감찰 이추(李抽)등이 다시금 공과 공의 처남 심선(沈璿)이 벼슬에 있음이 옳지 못하다고 아뢰었으므로 임금이 황희(黃喜)와 김종서(金宗瑞)를 시켜 의론하게 하니 모두 말하되「이추(李抽)등이 항상 떼거리를 지어 어진 사람들을  시기하니 마땅히 파직하소서」하였다.

이에 앞서 1436년에 공께서 문효공의 명으로 목옹공(木翁公)의 구경당(具慶堂)을 수리하여 영모재(永慕齋)라 고쳐 불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모든 형재들과 모여 검약한 유풍(遺風)을 강명(講明)하셨다. 1453년에 문효공께서 돌아가시어 1455년에 상복을 벗으셨는데 얼마 안 되어 노산군(魯山君)단종의 변(變)이 일어났으므로 공께서 좌랑(左郞)으로서 병을 칭탁하고 관아에 나가지 않으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돌아가시니 이 때가 1457년 10월 모일이요 연세가 51세였다. 마나님 의인(宜人)청송 심씨는 양혜공(良惠公) 석준(石儁)의  따님 이다.
한 아드님을 두시니 휘는 중호(仲浩)요 벼슬은 판관이었는데 몰래 영월(寧越)로 들어가셨다가 일이 발각되어 고초를당하셨다,
두 사위는 목사(牧使) 문수덕(文修德)과 정승현(鄭承賢)이다 휘 중호(仲浩)의 장남 휘 윤문(潤文)은 판관이었는데 함경도로 귀양가신 뒤 소식이 끊어졌고, 차남 휘 한문(漢文)은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지내셨다.
공의 행적이 흩어진 지 오래인데 후손 원준(垣準)이 가전(家傳)과 보록(譜錄)과 세종실록 및 창계비록
을 애써 찾고 규홍(奎泓)이 행록(行錄)을 찬술하여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하여 옛 부천의 소래산(蘇萊山) 제단에 비석을 세우려한다, 제단은 공과 의인(宜人) 심씨를 위한 것이니 문효공 묘소의 청룡 자좌(靑龍子坐)에 모셔졌다.
이에 명(銘)한다.

인간 세상에서 그 영화는 일순이데 얻으면 기쁘고 잃으면 불행하네

충성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는다면 그 아니 깨끗한 희생인가?

이것을 배반한다면 이는 녹록한 사람이어라 이와 같이 보건데 공의 부끄러움은 무엇이리?

묘 아닌 제단(祭壇)이 소래산 기슭에 모셔셔 무성한 풀 좋은 나무 서리 선령이 오르내리시네.

동쪽으로 영월 바라보니 산은 푸르고 두견 소리 구슬프네.

혼령이 돌아오심 구름과 바람 타듯 내 맑은 슬픔 새기노니 지나는 이여 읽을지어다.


그동안 후손들이 문효공 선조님묘소 밑에 설단을 마련하여 묘소를 대신하고 있다가 2009년 다시 가묘로 단장해 묘사를 모시고 있다  두분의 가묘는 경기도 시흥시 신천리 소래산 문효공 묘소 아래에 단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