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령공(縣令公) 휘 하신(河紳)선조님의묘소

남해현령공(縣令公)하신(河紳)14세손

 

 선생의 휘는 신(紳)이요, 사직공 14세손이며 대사간(大司諫) 휘 결(潔) 할아버지의 장자이신 참의공(參議公) 휘 금(襟)의 아들 7형제 중 다섯째 아들이다.일곱 형제의 휘자는 첫째 대(帶), 둘째 려(礪), 셋째 주(澍), 넷째 치(治), 다섯째(紳)여섯째 순(淳), 일곱째 준(濬)이다.
 선생은 태종 13년(1414)에 출생하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천성이 뛰어났으며 특히 학문에열중하여 성장하면서 의표(儀表)가 뚜렷하고 앞날이 촉망되어 이웃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전한다.

세종 18년(1432)에 생원(生員)이 되고 다음 해에 문과에 오르시어 여러 직책을 역임하셨는데 이때에 조선 남쪽바다의 연안 도서지방에 왜구가 수시로 침입하는 등 민심이 흉흉하던 터에  남해현(南海縣)을 새로 설치함에 따라 비록 남해가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이지만 새로 설치 되는 남해현의 중요도에 비추어 현령에 취임할 인물은 뛰어난 재능과 풀륭한 덕망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백성들의 믿음을 살 수 없을 것이랑 판단 아래 사람을 물색한 나머지 여러 사람의 추천에 의하여 선생이 현령으로 발탁되었으니 이때가 선생의 연세 24세 때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중임 (重任)이었지 좌천(左遷)이 아니었다.선생은 현령으로 부임하자마자 제일 먼제 학교를 세워서 예법을 숭상하게 하고 관청을 지어서 왕정(王政)의 기강을 세워 나갔다.

선생은 조정의 행정력이 변방까지 잘 미치지 못하였던 당시 심혈을 기울여 민심을 수습하고 어진 정사를 훌륭히 완수하여 남해현 초대 현령으로서 책무를 완수하고 퇴임함으로써 오늘날 남해군(南海郡)의 탄탄한 가반의 초석이 되었다고 볼진대 그후예들은 자랑스런 입남조(入南祖)를 모신 것을 자부할 만하다.
 선생은 임기를 마치고 호산(湖産)의 승경(勝景)과 풍성한 수륙산물(水陸産物)에 마음이 끌려 이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사시니 그 자손이 500여 년 동안 번창하여 오늘날 2000여 세대의 남해 하씨문중을 형성하여 500여 호가 남해군내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1.500세대 이상이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북에 산재하여 화목을 다지고 있다.

선생은 1414년에 나시고 1458년에 돌아가시니 남해 서쪽 장생촌(長牲村) 묘좌에 묻히시었다. 부인 숙인이씨도 같은 해에 돌아가시니 선생과 합봉(合封)되시었다.

선생의 세 아들 중 첫째 휘 자파(自破)는 서윤(庶尹)이요, 둘째 휘 자애(自埃)는 진사(進士)이고, 셋째 휘 자감(自坎)은 무과에 올라 고성현령(固城縣令)을 지내셨다.한편 선생의 손자에는 호조좌랑(戶曺佐郞)을 지낸 맹인(孟仁), 그리고 맹량(孟良)과 맹의(孟義)는 통덕랑(通德郞)이요, 숙정(淑禎)은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증직되시고 끝으로 휘 유정(有禎)이 계셨다. 비록 선생의 후예들이 지방에 계셨지만 사대부 집안의 전통을 성실히 지켜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