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 현감공 휘 복산(仁同縣監公 諱 福山)선조님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 영당곡 을좌

인동현감공 하복산(河福山) 14세손
 

문효공할아버님의 둘째손자이자 참판공  효명(孝明) 선조님의 둘째 아드님이신데 형님인 맹순(孟洵)선조님이 일찍 후사도 없이 돌아가시니 장남아닌 장남이 되었다  벼슬은 인동 현감(縣監)을 역임하셨다. 어머님은 정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며 절제사(節制使) 이승간(李承幹)선생의 따님이시다
선조님은 1429년에 출생하여 1498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였다  묘소는 원래 천안 목천 호현(狐峴) 임좌(壬坐) 에 모셔 졌는데 1979년 국가의 안산공업단지조성 사업 때문에 1980년  안산 내장산에 모셔져 계시던 선생의 부친이신 참판공(孝明)선조님과  함께  후손들의 묘가 있는 청원군 현도면 우록 뒷산으로 이장을 하였다  
마나님 숙인 (淑人) 회덕황씨(懷德黃氏)는 이조판서 상문(尙文)의 따님인데 묘
는 합봉이다 자제분들은 1남1녀를 두셨는데 아드님 휘는 징(澄) 이시며 현감을 역임 했으며 나중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 되셨다 사위는 안동 권호(權顥)이다  손자들은  네분을 두셨다 첫째가 彭老 (팽노) 둘째元老 (원노) 셋째 忠老 (충노) 넷째 仁老 (인노)이시다

문종(文宗)임금께서 친히 문효공선조님의 문병을 오셨서 국사를 물으시고  또 집안에 무슨 한 되는 일이 없는가를 물으시니 문효공 할아버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나라가 태평하고 조야에 아무 일이 없는 가운데 외람되어 성은을 입사와 영귀함이 지극하온데 무슨 한되는 바가 있으리이까 ?" 하시니 여러가지 위문의 말씀끝에 장손자 (맹순(孟洵)가 일찍 요절하셨 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경은 일국의 현상(賢相)인데 명문의 종손에게 어찌 관직(官職)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라고 하시면서 종손(宗孫)에게 복산(福山)이라는 아명을 제수(除授)하고 별제(別提) 벼슬의 현감(縣監)을 제수 하시었다

아우님들은 첫째 아우님 휘 맹서(孟서)는 중훈대부행강령현감(中訓大夫行康翎縣監) 이며 둘째 아우님 휘 맹제(孟濟)는 장사랑(將仕郞)이고 세째아우님 휘 맹식 (孟湜)은 통훈대부행자산군수(通訓大夫行玆山君守)요 넷째 아우님 휘는 맹윤(孟潤)은 가선대부 형조참판(嘉善大夫形曹參判)을 지냈다 인동 현감공 휘 복산(仁同縣監公 諱 福山)선조님후손들은 인천문학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 청주 서산 해미 단양 당진 일대 홍성군 결성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 본정 경북 대구 일대 성주군 대가면 상삼리 일대 경남 의령군 칠곡면 내조마을  사천군 곤양 덕포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밀양시.청도면 조천.창녕군. 고암면 계팔 , 신기동 , 출신은 참판공의 장자 인동 현감공 휘 복산(仁同縣監公 諱 福山)선조님의 후손들이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

 

인동현감공(仁同縣監公)휘 복산(福山)墓表

공의 휘는 복산(福山)이요 벼슬은 인동현감(仁同縣監)이다. 우리 진양 하씨는 고려 사직공(司直公) 휘 진(珍)을 시조로 삼아 잇따라 높은 벼슬을 누렸거니와, 9세 이신 휘 집(楫)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천부원군(晋川府院君)이신 바, 시호는 원정(元正)이요, 호는 송헌(松軒)이다.
송헌 선생 아드님 휘 윤원(允源)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이신데, 호는 고헌(苦軒)이시다. 고헌선생 아드님 휘 자종(自宗)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병조판서 증 의정부좌의정(左議政)이신데, 호는 목옹(木翁)이다. 이 세분은 함께 진주 경덕사(景德祠)에 배향되셨다.
선조님의 휘는 연(演)인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영의정(領議政)을 지내셨다. 시호는 문효(文孝)요 호는 경재(敬齋)인데 문종묘(文宗廟)에 배향되시니, 세상에서 경재선생(敬齋先生)이라 일컫는다. 아버님의 휘는 효명(孝明)인데 군자부정(軍資副正) 증 이조참판이시다. 어머님 정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절제사(節制使) 승간(承幹)의 따님이다.
공이 1429년에 출생하여 1498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0세 이었다. 묘는 예전에 목천(木川)호현(狐峴) 임좌(壬坐)에 모셔졌는데, 후에 청원(淸原) 우록동(友鹿洞) 뒷산 아버님 묘소 밑 을좌(乙坐)에 이장되었다. 마나님 숙인(淑人) 회덕황씨(懷德黃氏)는 이조판서 상문(尙文)의 따님인데, 1433년에 나시어 1504년에 돌아가셨다.묘는 합봉이다.1남1녀를 두셨는데 아드님 휘 징(澄)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고, 사위 안동 권호(權顥)는 전적(典籍)을 지냈고 외손자 적(勣)은 부사(府使)를 지냈다.
손자와 증손자는 아드님 휘 징(澄)의 묘갈문에 실리 었으므로 기록하지 않는다.아, 공께서 돌아가신지 거의 500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묘소는 외딴 곳에 있고 아득히 먼자손들은 호남과 영남에 흩어져 있어 가을철 시향(時享)때면 항상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 많은 터에, 요사이 내장산(內藏山)의 누대(累代) 선영이 국령(國令)에 의하여 딴 곳으로 이장되게 되어 역사를 하려 함에 즈음하여 여러후손들이 의논하여 공의 묘소 또한 상기한 자리에 옮기기로 하였는 바, 이 곳은 위에 아버님묘소가 있고 아래에 아드님 묘소가 있으며 방친(傍親)의 묘소가 또한 많은 곳이다.
이 때에 있어 가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사이에 섭섭함이 없게 되었다고 이를 만하리니 공의 신령 또한 명명지중(冥冥之中)에 기뻐하시리라 생각되는도다 .

 

조선왕조실록

 세조 12년 병술(1466, 성화 2) 3월 23일(갑자)

   세자에 대해 예우할 것을 전지하다

새벽에 대가(大駕)가 움직이었는데, 중로(中路)에 왕세자가 길가에서 말에서 내리자 선전관(宣傳官) 권필(權?)조맹춘(曹孟春) 하복산(河福山) 남이(南怡)가 모두 말에서 내리니, 임금이 곧 의금부(義禁府)에 내리기를 명하였다. 통천(通川)에 이르러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세자(世子)가 변(便)을 보러 골짜기에 들어가는데, 운검(雲劍)선전관(宣傳官) 등이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니, 이는 전에도 들은 바가 없고 뒤에도 볼 바가 없는 일이다. 어찌하여 풍속(風俗)이 이와 같은가? 이는 국가(國家)의 조정 대신(朝廷大臣)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근심하고 염려하는 단서이다. 무릇 천하의 인륜(人倫)은 친함[親]과 의리[義]뿐이다.
친하면 사랑하고 의리로는 공경하니, 친함에 의리가 없으면 금수(禽獸)와 같고 의리에 친함이 없으면 오랑캐이다. 이런 까닭으로 공경과 의리가 서면 인도(人道)가 튼튼할 것이고 공경과 의리가 폐하면 인도(人道)가 허물어질 것이다. 인도가 허물어지면 국가가 허물어질 것이고 국가가 허물어지면 천하가 허물어질 것이며, 천하가 허물어지면 군신(君臣)과 오륜(五倫)이 없을 것이니, 이는 일찍이 예의(禮義)를 닦지 아니하고 정(精)에 맡겨 사사로움을 행하는 극치이다. 고금천하(古今天下)에 해와 달이 세계를 비치는데, 어찌 여기에 벗어 남이 있겠는가?
만약 사심(私心)이 발하여 능히 예의를 지키지 못한다면, 수고로움을 당해서는 집에 돌아가 누울 것이고 편함을 당해서는 일을 버리고 놀 것이다. 만약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한다면, 종친재상장수가 모두 너희들의 높은 계급인데, 어찌하여 대신(大臣)에게는 두루 예(禮)를 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약, ‘장차 우리의 임금’이라고 한다면, 이는 장심(將心)이다. 장심을 옛사람이 어떻게 논하였는가?”

하였다.

【원전】 8 집 11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