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공 휘 맹서(孟서)선조님의 설단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산920

하맹서(河孟서)14세손
 

참판공 휘 효명(孝明) 할아버님의 3남 이시다 중훈대부행강령현감(中訓大夫行康翎縣監)을 역임했다 우리 진양하씨는 고려 사직 휘 진(珍)을 시조로 삼아 그 후 대대로 혁혁하였고 휘 즙(楫) 진천부원군에 이르러 원정(元正)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호는 송헌(松軒)인데 휘 윤원(允源) 진산부원군을 낳으셨다. 이 분의 호는 고헌(苦軒)인데 휘 자종(自宗)병조판서를 낳으셨다 이 분의 호는 목옹(木翁)인데 삼대가 고려 말에 가장 현저하였다, 목옹공의 아드님 휘 연(演)께서 조선 세종 때에 벼슬하였는데. 문효공(文孝公)이라는 시호를 받으셨으니 이 분이 세칭 경재(敬齎)선생이다,선생의 맏아드님 휘 효명(孝明)은 이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참판공 휘 효명이 아드님 다섯 분을 두었는데 둘째 아드님 맹서(孟서)가 세종 때에 명경과 진사가 되어 특별히 황해도 해주 진관병마절제도위 겸 강령(康翎)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사육신(死六臣)이 화를 당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소래산 선영 아래로 돌아와 사셨는데. 향년 33세로 돌아가시어 안산 내장산에 묻히셨다, 배위는 성산 이씨(星山李氏)이니 중추부 경연관 연길(延吉)의 따님인데. 묘는 쌍봉이다. 두 아드님을 두었는데, 장자 휘 심(심)은 참봉이었으며 인천에서 영천의 신녕(新寧)으로 옮기어 사시었다. 이에 앞서 아우님 진사공 휘 탄(灘)께서 점필재(점畢齋)김선생 문인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당하여 영천에 귀양가서 살다가 돌아가셨으므로 참봉공이 세 조카를 데리고 상례를 치르기 위해 갔다가 머물러 사시게 된 것이다. 배위 남양 홍씨(南陽洪氏)가 휘 자연(自淵)을 낳으셨는데 종사랑이었으며 묘는 창녕 구치산(鳩峙山)자좌에 있다,

영천에서 처음으로 창산(昌山)의 계주말(繫舟末)에 옮기어 살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술정(述亭)인 바 자손이 드디어 대대로 살면서 창녕인이 되었다. 휘 자연의 아드님은 휘 영(泳)이요. 그 묘는 고을의 서쪽 사지촌(沙旨村)자좌에 있고 휘 영의 아드님은 휘 청(淸)인데 장사랑이었고 휘 중백(仲伯)을 낳으시니 종사랑이었다. 한강(寒岡) 정선생이 이 고을 원으로 와서 말하기를「같은 세상에 난 것이 어찌 우연이리요? 우의가 친척 같으니 함께 이 고을을 다스리자」고 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술정기문(述亭記文)을 지어 이르되 말을 타려다가 주저하노니 무엇으로 정을 줄꼬? 정자를 술정이라 하였으니 기술(記述)하여 잊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술정 하씨의 선계(先系)와 선적(先蹟)이 족보와 하씨 문헌록과 읍지(邑誌)에 실려 있는 대개로되 족히 후세에 고징이 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오직 현감공과 손자 종사랑공 부자의 삼대 묘소는 세월이 오래되고 난리를 겪어 증거가 없어 실전되어 제사를 모실 수 없어 후손 된 자들이 통감한 지가 오래더니 이에 상춘(相春) 상구(祥龜)가 본읍 및 영천에 사는 일족과 상의하여 사는 곳 북쪽 수리(數里) 되는 천제 당산(天祭堂山) 기슭에 터를 잡아 세단을 한 터에 설치하여 무덤을 대신하여 차례로 세사(歲事)를 모시게 되었으니 역시 의를 일으키는 예요 두터운 데로 돌아가는 도이다. 또  한 비석을 터 앞에 세워 총괄하여 표시하고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전말을 기록하려 하므로 내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사실을 위와 같이 쓰고 인하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말하노라.

「고인이 말하기를 신령이 천하에 있는 것이 물이 땅속에 있음과 같다 하였으니 지금 물이 땅 속에 남아 있음이 없는 곳이 없어서 파면 얻느 것이거든 하물며 조선(祖先)과 자손 사이엔 한 기운이 흘러 통하니 어찌 묘나 단이나 차별이 있겠는가?」또 말하기를 「그 정성이 있으면 그 신령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각기 정성을 다하여 신령님께서 감응하시게 되기를 구할 것이요 한갓 단선(壇선)을 갖춘 일과 제물을 풍부하게 바치는 것만으로 잘하는 일이라고 여기지 아니함이 옳을 것이다」

사직공 14세손 현감공 휘 맹서(孟서)와 16세손 종사랑 휘 자연(自淵) 17세손 휘 영(泳)등 세분의 묘소가 실전되어 이곳에 설단 하였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산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