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윤공 (左尹公) 하한문(河漢文) 15세손
 

우리 하씨의 본관은 진양인데 고려 사직공(司直公)휘 진(珍)을 시조로 모신다. 누대(累代)를 내려와서 휘 즙(楫)께서 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였는데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천 부원군에 봉해지고 원정(元正)이란 시호를 받으셨고 휘 윤원(允源)께선 호를 고헌(苦軒)이라 하셨는데, 중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에 봉해지셨고 휘 자종(自宗)께선 호를 목옹(木翁)이라 하였으며 병조판서에 임명되신 일이 있거니와 고려가 멸망하매 두문동(杜門洞)에 은둔하였는데 조선에서 좌의정으로 증직되었으니 이는 대를 이어 크게 현달(顯達)하심이다  증조부님 휘연(演)께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領議政) 영경연(領經筵)예문 춘추관(春秋館) 서운관사(書雲觀事) 세자사(世子師)를 지내고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으셨으니 이 분이 세상에서 일컫는 경재 선생(敬齋先生)이시다 조부님 휘 제명(梯明)은 의영고 직장(義盈庫 直長)돈령부 직장(敦寧府直長) 겸 예조좌랑(禮曹左朗)을 지내셨는데 노산군(魯山君:端宗)이 사약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분통하여 곡기(穀氣)를 끊고 돌아가셨으며 아버님 휘 중호(仲浩)는 조봉대부(朝奉大夫)거산찰방(居山察訪)겸 예빈시 판관(禮賓寺 判官)을 지내셨는데 좌랑공이 절의(節義)로 돌아가신 후 몰래 영월(寧越)에 들어갔던 일로 많은 고초를 겪으셨다

어머님 공인(恭人)강릉 함씨(江陵咸氏)는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 참찬(參贊)동원군 우치(禹治)의 따님이다. 부군(府君:左尹公)의 휘는 한문(漢文)이요 자는 성장(成章)인데 1454년에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 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한 번 보고 바로 기억하였으며 문예를 일찍 이루어 빛나는 명성을 떨치셨다. 가정대부(嘉靖大夫)한성 좌윤(漢城左尹)행 수원도호부사(行水原都護府使)를 지내고 원종二등공신(原從二等功臣)으로 녹훈(錄勳)되셨다. 청렴 정직 공명함으로 이름나셨는데 곧바로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와 신진(新進)을 훈육함을 첫째 즐거움으로 삼으셨다. 1512년에 돌아가시니, 향년59세였고 묘는 광주(廣州)구천 일동(九川一洞)곤좌(坤坐)에 모셔졌다. 마나님 정부인(貞夫人)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인데 아버님은 밀성군(密城君)침(琛)이요 조부님은 세종대왕이고 증조부님은 태종대왕이시다

묘는 쌍봉이다 부군께서는 아들이 없으시어 조카 휘 익정(益精)을 후사로 삼으셨고 휘 익정은 호군 부사과(護軍 副司果)를 지내셨으며 따님은 영흥부사(永興府使) 한세창(韓世昌)에게 출가하였다. 이하는 생략한다 부군의 분묘가 있는 산지(山地)가 마땅하지 않아 이제 아드님 호군공(護軍公)묘소 경내(境內)에 이장하고 비석을 세움에 나에게 음기(陰記)쓰기를 청하는지라 이장(移葬)을 모심에 있어 표징(表徵)이 없을 수 없으므로 위와 같이 삼가썼다  시종 애쓴 사람은 후손 규홍(奎泓),이수(怡秀),준호(準鎬), 재민(在玟), 취홍(聚泓)이다 이에 명(銘)한다 임천(林泉)에서 덕을 기르시고 영달(榮達)을 뜬 구름으로 여기셨네 영재를 가르치시어 유학(儒學)을 일으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