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공(司直公) 하유곤(河有崑)15세손

 

1531년 11월에 하공(河公) 숙옥(淑玉)을 정읍현(井邑顯) 서쪽 마석산(磨石山)동록에 장사(葬事)하고 이듬해 4월에 마나님 장씨(張氏)를 공의 묘 왼쪽에 장사하여 비석을 세우려고 아드님 수종(守宗)이 세덕(世德)을 약기(略記)하여 나를 찾아 와서 비문을 청하매 이에 적는다, 공의 선조 진주인(晋州人)원정공(元正公) 휘 즙(楫)과 어사대부(御史大夫)휘 윤원(允源)은 고려의 명신(名臣)이었다. 그 아드님 휘 자종(自宗)은 가정대부(嘉靖大夫) 청주목사(淸州牧使)였고 그 아드님 휘 결(潔)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었다. 그 아드님 휘 금(襟)은 음덕(陰德)으로 처음에는 사헌부 집의(執義)로 발탁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노령으로 그만두시니 임금께서 그 조용한 성품을 가상히 여기고 포상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승직시키셨다.

그 아드님 휘 여(礪)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이었고 마나님 강씨(姜氏)는 생원(生員) 극창(克昌)의 따님인데 1481년 6월에 공을 낳으셨다. 공의 휘는 유곤(有崑)이요 자는 숙옥(淑玉)인데  무예(武藝)에 뛰어나 병사(兵使) 유담년(柳聃年)의 남정(南征)때와 황형(黃衡)의 북벌(北伐)때에 내금위(內禁衛)로 종군하였으니 공의 어짊을 알 만하다 뒤 에 서울로 돌아와 밤에 도적을 잡다가 도적의 화살이 왼쪽 팔뚝에 맞아 상처가 심하였는데 임금께서 특히 의약을 주셨으니 이는 그 재주를 아끼심이었다. 늙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날로 벗님들을 불러 술로써 즐기시니 고을 사람들이 고매(高邁)한 분이라 여기었다

1531년4월 5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마나님 장씨(張氏)께서 슬퍼함이 지나쳐 병환을 얻어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연세 57세였다, 마나님 생존시엔 종중(宗中)에서 흠잡는 말이 없었고 돌아가시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흐리었다. 그 아버님은 중직대부(中直大夫) 치평(致平)이니 선공감(繕工監)정합(正合)의 증손이다 아드님 수종(守宗)은 부사(府事)정세현(鄭世賢)의 따님과 혼인하였는데 아직은 아들이 없다. 이에 명(銘)한다

울창한 저 아름다운 성(城)은 소가 잠든 언덕이네

이 비명(碑銘)을 보는 자는 공이 어지신 분의 후손임을 알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