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진사(成均進士)하자애(河自애)15세손

남해읍(南海邑)남쪽 20리 상가리(上加里)내곡산(內谷山)기슭에 수척(數尺)의 높은 비석이 있는데. 이는 성균진사(成均進士)하공(河公)과 마나님 의인(宜人)함풍 노씨(咸豊魯氏)의 제단(祭壇)이다 공의 휘는 자애(自애)인데 진양인(晋陽人)이다

중세(中世)에 진천부원군 시호 원정공 휘 즙(楫)과 진산부원군 휘 윤원(允源)과 병조판서 증 좌의정 휘 자종(自宗)이 계시어 3세(世)를 이어 집안이 환히 빛났다. 증조부님 휘 결(潔)은 대사간(大司諫)이셨고 조부님 휘 금(襟)은 공조참의(工曹參議)이셨고 선고님 휘 신(紳)은 현령(顯令)이셨다 선비(先비) 영천 이씨(永川李氏)영천군(永川君)응(膺)의 따님이다 현령공 휘 신(紳)이 남해 원님이 되시매 공(進士公)께서 아버님을 따라 남해 고을에 와 사시면서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하고 형제와 함께 부모님을 봉양하다가 이 곳에서 돌아가셨는데, 묘는 서면(西面)의 남산(南山)평지에 있었다.

2남을 두셨는데 맏아드님 증 사헌부 지평(贈司憲府持平)의 휘는 숙정(淑禎)이요 둘째 아드님의 휘는 유정(有禎)이다 휘 숙정(淑禎)의 아드님 휘는 식(湜)인데 좌랑(左郞)으로 증직되고 휘 유종(有禎)의 아드님 휘는 열(열)인데 참봉을 지냈다 증손 이하는 적지 않았다. 오호라! 임진왜란 때 자손이 동서로 흩어져 묘를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지금까지 300여 년 동안 성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그 후손 주형(柱炯)이 탄식하고 태조(泰祚) 석필(錫弼) 정석(正錫)과 상의 하여 문중의 찬동을 얻어 단(壇)을 선영(先塋)의 넓직한 곳에 모시고 그 방손(傍孫)인 재섭(在涉)이 지은 유사(遺事)한 통을 가지고 와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므로 삼가 그 유사의 내용을 취택하여 서(序)를 쓰고 이어 명(銘)한다.

공의 선대는 진주에서 나셨는데 이 곳에 터전을 정해 자손이 퍼졌도다

여러 차례 병란으로 묘소를 잃어서 단(壇)을 모시고 제사드리니

추모의 정 넘치누나. 이 말을 돌에 새기니, 천만 년이나 전해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