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부사공(善山府使公) 하맹산(河孟山)15세손

 

하씨가 진양에서 일어나 대족(大族)으로 번성하였는데, 진주(晉州) 서쪽 신대리(申大里)에 사는 것은 옛 선산부사(善山府使) 초은공(樵隱公)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공의 위계가 조열(朝列)에 올라서, 여러 고을의 원을 역임하였는데도 초은(樵隱)을 호로 삼으신 것은 공의 뜻이 자취를 숨기고, 벼슬에 얽매이지 않으려 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계(世系)를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맹산(孟山)이요, 자는 인보(仁甫)인데, 그 선대에 계시었던 원정공(元正公) 휘 즙(楫)과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휘 윤원(允源)이 가장 현달하신 조상이요,
군사(郡事) 휘 계종(啓宗)과 중정공(中正公) 휘 숙(潚)과 부윤(府尹) 휘 만지(萬枝)와 부사(府使) 휘 자곤(自崑)은 공의 고조.증조.조부.선고님이시다. 공은 1433년에 한양(漢陽)에서 태어나셨는데, 모습이 준수하고 기량과 식견이 특출하여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모든 행동을 법도에 따라 하시니, 보는자 누구나 감탄하지 않는 자 없었다.

23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2년 후에 선무랑(宣武郞)으로서 외직으로 나가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어 직무에 심혈을 기울이시니, 정치가 맑아지고 간요(簡要)하여졌으므로, 관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반가이 따랐다.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갈 때 고을 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1467년에는 공훈으로 원종二등공신에 책정되고, 이듬해에 당상관(堂上官)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었는데, 정치를 안음(安陰)에서와 똑같이 하시어,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였다.

연산주(燕山主)가 즉위하여 황음무도(荒淫無度)하고 간신들이 농권(弄權)함에 미치니 공이 벼슬살이를 싫어 하여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신대리가 아주 빼어난 곳임을 보시고 일곱 나무가 숲을 이룬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손수 나무하고 나물 캐며, 한가하면 낚시를 드리우고 시냇가에서 부앙(俯仰)하고 소요하며 만족해함을 즐거움으로 삼으셨다. 남이 문안하러 오면, 시와 술로써 응대(應對)하되, 이름이 알려짐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연산주 신유년 곧 1501년에 향년 69세로 돌아가시어 그 뒷산 자좌(子坐)에 묻히셨다. 이상은 공의 시종(始終)의 근거이나, 그 상세한 것은 고징할 수 없는 바이다.

공의 후손 영무성(寧無成) 선생 휘 응도(應圖)와 어은공(漁隱公) 휘 응회(應會)와 신계(新溪) 선생 휘 천주(天澍)가 다 학행으로 당시에 드러나 삼고대(三高臺)의 이름이 있는 것은 또한 공의 끼치신 덕의 전해짐이리라. 이에 이와 같이 추술하고 시를 지어 기린다.

적개(敵慨:임금의 원한을 풀어 드림)의 공로 있어,

동궁(공신에게 내리는 붉은 활)의 포상이 내려졌네.

상황을 바로 알고 아첨하지 않으심은 바위보다 굳은 지조로다.

칠수정(七樹亭) 있는 곳에 삼고대가 있었으니,

군자에게 후광(後光) 있음이로다. 뭇 사람 우러러보는 드높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