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현감공(延日顯監公) 하구수(龜壽)15세손

공의 휘는 구수(龜壽)요 자는 대시(大蓍)이요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시조의 휘는 진(珍)인데 고려 사직(司直)이시었다. 8대 조부님 휘 보(보)께서 판서(判書)로 증직되시었는데 원(元)나라 사람이 칭제(稱帝)함을 보시고 벼슬하지 아니하시었다. 7대 조부님 휘 직의(直의)께선 대광보국 숭록대부 문하도첨의 정승으로 증직되시었고 6대 조부님 휘 즙(楫)께선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부국 숭록대부 진천 부원군에 봉(封)해지시고 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셨는데 직언(直言)으로 이름나시었고 5대조부님 휘 윤원(允源)께선 충혜왕 말년에 등과(登科)하시고 공민왕조에 전리총랑(典理總郞)으로서 여러 대장을 도와 서울을 수복(收復)하시었거니와 우왕(우王) 초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시어『아닌 줄 알고도 잘못 처단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란 여덟 자를 쓴 목패(木牌)를 벽상에 건 연후에야 사무를 보시었다. 호를 고헌(苦軒)이라 하시었고 진산 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지셨다.

고조님 휘는 계종(啓宗)인데 문경 군사(聞慶郡事)를 지내셨고 증조님 휘는 척(滌)인데 창녕현감(昌寧縣監)을 지내셨고 조부님 휘는 맹질(孟질)인데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내신 뒤 청백리로 지정되시었고 선고님 휘는 주(澍)인데 세자 우시직(世子 右侍直)을 지내시었다 전비(前비)님은 숙인(淑人)장수 황씨(長水黃氏)시고 계비(繼비)님 숙인 진양유씨(晋陽柳氏)는 좌찬성 자해(子諧)의 따님이시다.


공께서 세종 임술년 곧 1442년에 나시었는데 뛰어난 인품이 보통 아이와 다르시어 보는 이들로 탄상(歎賞)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성종 때에 벼슬길에 오르시어 연일(延日)과 영산(靈山)의 두 고을을 다스리시어 명성 높은 치적(治蹟)을 남기시었다. 친상(親喪)을 당하시어서는 슬퍼함이 지나쳐 거의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시었다. 두 아우님과 서로 우애하심이 더욱 두 터웠고 여러 아드님을 가르치심에 법도가 있었다. 1501년 3월 28일에 돌아가시니 사람들이 그 큰 기국(器局)이 다 쓰이지 못하였음을 아까와 하였다.

묘는 오배산(鰲背山) 계좌(癸坐)에 있다, 마나님 숙인(淑人) 전의 이씨(全義 李氏)는 영해 부사(寧海府使) 계손(季孫)의 따님이시요 참찬(參贊)구직(丘直)의 증손이시오 영의정(領議政) 구 양(具揚)의 외손이신데 돌아가시어 공의 묘에 합장되시었다. 계배(繼配)님은 숙인(淑人) 창원 김씨(昌原金氏)이신데 같은 곳 계좌(癸坐)에 묻히시었다. 3남 중 장남님 휘 부(傅)는 진사가 되셨고 차남님 휘 관(灌)께선 별제(別提)로 천거되셨으나 부임하지 않으시었고 다음 휘 홍(泓)은 문과 판관(判官)을 지내셨는데: 세 부 다 올바른 행실로 세상에 이름나시었다.

휘 부(傅)의 아드님 휘 주(舟)는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이셨고 휘 관(灌)의 계자(繼子)님 휘 현(舷)은 충순위(忠順衛)시었다 따님 한 분께선 광주 이씨(廣州李氏) 춘남(春男)님께 출가하시었고 한 분 은 찰방(察訪)이셨던 권 수(權守)님께 출가하시었다 휘 홍(泓)의 아드님들 중 휘 함(艦)은 우후(우侯)시었다. 현(舷)은 계자로 나가셨다. 휘 항(航)은 직장(直長)이셨고 휘 황(황)은 내금위(內禁衛)시었다. 따님은 군수 최 홍의(崔弘義)님께 출가하시었다, 공께선 역대 고관 집안의 몸으로 효우(孝友)를 근본으로 삼고 시(詩)와 예(예)로 생활하셨는데, 능히 이름을 떨치는 조정 대임(朝廷大任)을 말지 못하시고 문음(門蔭)으로 원님 자리에서 그치셨으니 어찌 아깜지 않은고? 후손 대룡(大龍)이 일병(一秉)과 태석(泰奭)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사양하지 못하여 이에 명(銘)한다. 두 고을 다시리시니 100리가 봄볕같이 화평하였고 벼슬 높은 가통(家統)은 대대로 지켜졌네 지나는 초동 목동 경계시키기 위하여 여기 비석을 세워 표시하는 바이로다.

 

삼우당(三友堂)

연일 현감(延日顯監) 휘 구수(龜壽)께서 세 아드님을 두시었으니: 맏님 휘 부(傅)의 자는 언함(彦函)이요 버금님 관(灌)의 자는 언옥(彦沃)이요 셋째님 휘 홍(泓)의 자는 언영(焉泳)이다. 성종조 1481. 1483. 1485년은 각각 세 분의 생년이요 1532, 37. 47년은 각각 돌아가신 해이며 창녕(昌寧)의 등림(登林) 오배평(鰲背坪), 옥천(玉泉)은 각각 무덤이 있는 곳이다, 휘 부(傅)께서 연산군 1498년에 생원 진사가 되시었으나 은둔하여 벼슬을 하지 않으시었고 휘 관(灌)께선 젊으신 때부터 뛰어시고 남다르시어 활 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시었으나 그만 두시었는데. 충효로 이름이 높았기로 같은 고을의 병조 판서 이 장곤(李長坤)선생의 천거로 군기시 별제(軍器寺別提)가 되시었다가 이내 곧 고향으로 돌아가 숨으시었고: 휘 홍(泓)께선 급제하시어 여러 군읍(郡邑)을 다스리시어 이르시던 곳마다에 명성높은 치적을 남기시었거니와 얽매이지 않는 성품을 지니셨기로  어느 군(郡)의 통판(通判)으로 계시다가 벼슬을 버리시고 농촌으로 돌아가시었다.

지금 등림강(登林江) 가에 어부정(漁父亭)이 있고 그 당(堂)에 삼우당(三友堂)이란 현판이 걸렸는데 이는 공등(公等)세 형제님의 거처하시던 곳이다, 대개 그 때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은 뒤이니 집안 사람이 죄없이 화를 당한 것을 보시고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버리시고 자취를 감추어 낚시질을 소일하시며 스스로 강호 주인(江湖主人)이 되셨더니라. 정자 밑에 두 돈대(墩臺)가 있으니 소요대(逍遙臺)와 어풍대(御風臺)가 그것이요: 두 바위가 있으니 봉서암(鳳棲巖)과 탁영암(濯纓巖)이 그것인 바: 공등이 날로 그 위에서 노시었다. 정자가 본댁에서 떨어져 높은 고개 너머에 있으나 여러 자질(子姪) 님들께서 음식을 올림에 게을리 아니 하시어 숭늉이 늘 식지 않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