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계선(河繼先) 15세손
 


계선(繼先) 선조님은 자는 소옹(紹翁)으로 문효공(河演)선조님의 증손자이시며 형조참판공(孟潤) 선조님의 셋째 아드님으로 1470年에 태어 나셨다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생원시(生員試)를거쳐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年 문과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을 역임하셨다

조선 왕조실록

중종 71권, 26년(1531 신묘 / 명 가정(嘉靖) 10년) 7월 11일(임술) 4번째기사
소세양·오세한·박호·홍언필·윤안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소세양을 동지중추부사에, 오세한(吳世翰)을 경상우도 절도사에, 박호(朴壕)를 형조 판서에, 홍언필(洪彦弼)을 사헌부 대사헌에, 윤안인(尹安仁)을 집의에, 상진(尙震)황헌(黃憲)을 장령에, 채무역(蔡無?)을 지평에, 김희열(金希說)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하계선(河繼先)을 사간원 헌납에, 박세옹(朴世?)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7책 313면

 

 

중종 71권, 26년(1531 신묘 / 명 가정(嘉靖) 10년) 8월 5일(병술) 1번째기사
헌납 하계선과 지평 김미가 이지방의 일을 아뢰니 따르다

조강에 나아갔다. 헌납 하계선(河繼先)과 지평 김미(金?)이지방(李之芳)의 일을 아뢰니,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7책 316면

 

중종 72권, 26년(1531 신묘 / 명 가정(嘉靖) 10년) 12월 3일(임오) 4번째기사
송숙근·하계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숙근(宋叔瑾)을 평안도 절도사에, 하계선(河繼先)을 홍문관 수찬에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7책 348면

 

중종 72권, 27년(1532 임진 / 명 가정(嘉靖) 11년) 2월 2일(신사) 1번째기사
검토관 하계선이 사치의 폐단을 말하고 엄히 금할 것을 청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하계선(河繼先)이 아뢰기를,

“사치의 폐단에 대해서는 예부터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치의 폐해가 천재(天災)보다 심하다.’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사치의 풍습이 근래에 더욱 심해져서 서인(庶人)들조차 의복과 음식을 비할 데 없이 분수에 넘치게 하고 있으니, 법사(法司)가 엄히 금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치의 일은 경연(經筵) 때마다 대신이 말하였으므로 외방 사치의 폐단에 대하여 이미 유지를 내렸다.”

하였다.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1월 25일(무진) 2번째기사
강현·하계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현을 성균관 대사성에, 하계선(河繼先)을 사헌부 지평에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중종 80권, 30년(1535 을미 / 명 가정(嘉靖) 14년) 7월 2일(신유) 2번째기사
하계선·조사수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하계선(河繼先)을 홍문관 전한(典翰)에, 조사수(趙士秀)를 사헌부 지평에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중종 80권, 30년(1535 을미 / 명 가정(嘉靖) 14년) 9월 27일(을유) 6번째기사
한순령·한윤창·하계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한순령(韓舜齡)청천위(靑川尉)에, 한윤창(韓胤昌)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하계선(河繼先)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이이(李?)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소봉(蘇逢)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김윤석(金潤石)을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중종 90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4월 8일(을사) 5번째기사
하계선이 천사의 동정을 보고하니, 천사가 탈 말을 갖추라고 전교하다

문위사(問慰使)평양의 산대 놀이 때 불이 나서 천사가 놀랐으므로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문하였다.】 우부승지 하계선(河繼先)이 복명하고 서계하기를,

“6일 2경에 보산관(寶山館)에 도착하니 천사는 이미 취침 중이었기 때문에 배알하지를 못했습니다. 이튿날 해뜰 무렵 두 사신이 대청에 나와 앉았기에 신이 예를 행하고 이어 아뢰기를 ‘산대놀이 때의 실화로 두 대인들께서 놀라셨다는 말을 전하께서 들으시고 신으로 하여금 문안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하고 이어서 전교하신 뜻을 고하자 두 사신이 ‘매우 감사하다.’고 답하였습니다. 신이 또 고하기를 ‘전하께서는 두목들이 힘을 다해 불을 껐다는 말을 들으시고 변변찮은 물품【흰 모시 1백 10필이다.】을 보내 셨습니다.’ 하자 두 사신은 서로 돌아보고 웃으면서 말하고는 이어 신에게 ‘어찌하여 물품이 사람 수【두목은 94인이다.】보다 많은가? 우리들이 이미 상을 나누어 주었소.’ 했습니다. 신이 ‘전하께서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해 불을 껐다는 말을 들으시고 이것으로 뜻을 전하시려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두 사신은 두목들을 불러 섬돌 위에 열지어 꿇어앉히더니 한 사람에게 한 필씩 나누어 주고 그 나머지는 수행한 공이 있거나 불끄는 데 수고한 자들, 부엌일 하는 사람 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상사가 말하기를 ‘내 자제(子弟)는 계속 내 옆에만 있었기 때문에 불을 끈 일과는 무관하나 국왕의 후의를 보이기 위하여 아울러 나누어 주었소.’ 하였습니다. 안남국(安南國)에 사신을 보낸 일에 대해 이화종이 상사의 자제에게 물으니 ‘급사중(給事中) 두 사람을 보냈다.’고 대답했습니다. 원접사가 신에게 청하기를 ‘천사는 으레 주군(州郡)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오면 조서를 용정(龍亭)에 안치하고 즉시 말을 탈 것이니, 입경하는 날에는 잘 길들인 말에 안장을 갖추어 나와 기다리시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천사가 탈 말은 길들여진 좋은 말을 가리도록 하여 안장을 갖추어 나가 기다리는 것이 옳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8책 270면

 

중종 91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9월 13일(정미) 1번째기사
주인에게 불복종한 하인 옥환의 문제로 김극성과 의논하다

계복(啓覆)을 청리하였다. 승지 하계선(河繼先)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인 사노(私奴) 옥환(玉環)에 대한 추안(推案)을【주인 윤형(尹珩)에게 “나는 너의 종이 아니다.” 라고 욕하였으므로, 교대시(絞待時)로 조율되었다.】 아뢰어 삼복(三覆)을 끝냈다. 상이 이르기를,

“이 공사(公事)가 어떠한가?”

하였다. 영사 김극성이 아뢰기를,

옥환은 처음에는 이응규(李應奎)의 종이었으나 그 뒤에 윤형의 종으로 넘겨졌습니다. 옥환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더라도 윤형이 자기의 종이라 하여 잡아왔으니 마땅히 공손하고 온순하게 명령을 따라야 하는데도 도리어 욕을 했으니, 그 완악함을 알 수 있습니다. 법에 의하여 죄를 결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일렀다.

“공사에 의하여 조처하라.”

【태백산사고본】

 

진주성에서 순절하신 하계선(河繼先)이라는 분은 시랑공 후손 이다

아래의 繼先선조님의 대한 상소문은 연대가 안맞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계선선조님은 1470년생으로 만약에  임진란에 참여 하셨다면  연세가 100세가 헐신 넘었으며 신이복이라는 분이 이름이 똑같으니까 잘못알고 상소를 올린걸로 보인다
진주성 임진란에 참여하신 河繼先이라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편에 유생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젊은 학생이라는 뜻이다 아래의 시랑공후손으로 추정된다
시랑공 문중에 문의한 결과 임진왜란 그시대에 한문글짜까지 똑같은 하계선이라분이 계신다고 한다

진양속지 제3권/충의(忠義)    

○하계선(河繼先) : 본관이 진양(晉陽)이니 유생으로서 촉석성(矗石城)에서 순절했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편에 실림----
충민사(忠愍祠) 효종 임진년에 세우고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시민(金時敏) 자는 면오(勉吾)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벼슬은 우병사 증 영의정 상락부원군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양산도(梁山濤) 자는 회원(會元)이며, 벼슬은 공조 좌랑 증 좌부승지이다. 김상건(金象乾) 김천일의 법관인데 벼슬은 사포별좌 증 좌부승지이다. 이준민(李俊民) 벼슬은 거제 현령 증 병조 판서이다. 강희열(姜熙說) 의병장이다. 조경향(曺慶享) 벼슬은 진해 현감이다. 최기필(崔琦弼) 벼슬은 판관 증 호조 참의이다. 유사(兪)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의병장인데, 주부에 추증되었다. 이욱(李郁)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생원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강희복(姜熙復) 의병장이다. 장윤형(張胤賢) 벼슬은 수문장 증 호조 좌랑이다. 박승남(朴承男) 벼슬은 판관이다.

하계선(河繼先) 유생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최언량(崔彦亮)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고종후(高從厚) 고경명(高敬命)의 아들로 의병 복수장이다. 벼슬은 임피 현령 증 이조 판서이며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이잠(李潛) 무과 출신으로, 적개의병장이다. 이숭인(李崇仁) 본관은 송경(松京)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김해 부사 증 호조 판서이다. 성영달(成穎達) 본관은 창녕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경상 우병사이다. 윤사복(尹思復) 본주의 군관인데 벼슬은 첨정 증 호조 참의이다. 이인민(李仁民) 자는 자원(子元)이며 이준민의 아우이다.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정유경(鄭惟敬) 벼슬은 주부이다. 김태백(金太白) 벼슬은 수문장이다. 박안도(朴安道)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양제(梁齊) 선무랑이었다. 이상은 선조 계사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119권, 48년(1772 임진 / 청 건륭(乾隆) 37년) 10월 28일(기축) 1번째기사
장령 신이복이 고 군수 신초 등의 공이 곽재우와 같다고 상소하다

장령 신이복이 고 군수 신초 등의 공이 곽재우와 같다고 상소하다

장령 신이복(愼爾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故) 군수(郡守) 신(臣) 신초(辛礎)·승지(承旨) 신 하계선(河繼先)·사인(士人) 조방(趙?)은 위대한 공렬(功烈)이 실로 충익공(忠翼公) 신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같은 공으로 같은 지위에 있어야 하는데도, 유독 증시(贈諡)·증직(贈職)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실로 서운하게 여깁니다. 신초는 김해(金海)가 포위되어 궤멸될 때에 왕산(旺山)에다 책(柵)을 설치하고 말에 뛰어 올라 도강(渡江)하여 계책을 세워 적을 포박했으니 비록 옛날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일의 사적(事蹟)이 방책(方冊)에 밝게 실려 있어 신이 감히 낱낱이 번거롭게 진달하지 못하나 대저 그 충분 의열(忠奮毅烈)은 아직도 교령(嶠嶺) 밖에 늠름하게 남아 있습니다. 영우(嶺右)가 그때에 보존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공이니, 증휼(贈恤)하는 은전을 마땅히 곽재우와 더불어 고르게 대우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한 자급도 이 사람에게 미치지 않은 것을 누군들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계선은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의 증손(曾孫)으로 문장과 덕업(德業)이 한 세대에 추중(推重)된 자로서 마침 왜적(倭敵)이 창궐(猖獗)할 때를 당하여 김시민(金時敏)·장윤(張潤)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진양(晉陽)을 지켰는데, 성이 함락되기에 미쳐서 같은 때에 순국(殉國)하였습니다. 그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이미 조종조에서 정포(旌褒)하고 사당(祠黨)을 지어 제향(祭享)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증시와 증직에 있어서 마땅히 차등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김시민에게는 특별히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을, 장윤에게는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으면서 하계선만이 유독 이 예에서 누락되었으니 실로 영남의 사민(士民)들이 지금까지 애석해 하는 바입니다.

조방 역시 왜적의 난을 당하여 곽재우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적봉(賊鋒)을 저지하여 승리를 많이 거두었습니다. 난리가 끝난 후 향당(鄕黨)에서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해 장차 조정에 아뢰어 포상하려 했는데, 조방이 정서(呈書)를 빼앗아 중지시켰기 때문에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나 사적이 방책에 실려 있습니다. 인하여 죽었는데 포증(褒贈)하는 전례가 없으면 이 역시 크게 충(忠)을 권장함에 있어서 흠이 되는 한 부분입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서유상(徐有常)은 일찍이 이천(利川)에 재직하면서 포흠(逋欠)의 숫자가 많아서 대언(臺言)이 준엄하게 일어나 도신(道臣)이 이미 견책을 받아 파직되었으면 서유상의 죄범(罪犯) 역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니, 그의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미 큰 사면(赦免)을 겪었다고 하여 편안하게 부임할 수는 없습니다. 신은 서유상에게 파출(罷黜)하는 법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청한 바 세 사람은 세 갑자(甲子)가 돌아간 후에 어찌 경솔히 앞질러 포증(褒贈)할 수 있겠는가? 또 이러한 일은 일찍이 금령(禁令)이 있었다. 서유상의 일은 어찌 아끼겠는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원전】 44 집 43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