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령공 휘 효문(效文)선조님의 묘소 : 경남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안계

현령공(縣令公) 하효문(河效文)16세손

공의 휘는 효문(效文)이요 자는 모(某)여 호는 안재(安齋)이며 성은 하씨인데 관향은 진주이다 고려 사직 휘 진(珍)이 시조이신데 그 후에는 휘 즙(楫)이 계시어 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였고 진천부원군에 봉해지셨으며 원정공(元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이 분이 휘 윤원(允源)을 낳으니 호는 고헌(苦軒)이다 홍건적을 평정한 공로로 진산부원군에 습봉(襲封)되셨다. 고헌 선생이 휘 자종(自宗)을 낳으셨는데. 고려가 망함에 대사마(大司馬)의 벼슬을 사양하고 조선조에 굽힐 수 없는 의(義)를 지키시니 곧 목옹(木翁) 선생이시다 이분이 아드님 5형제를 두었는데 넷째 아드님 휘가 결(潔)이요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는데 문효공 휘 연(演)의 아우님이시다 증조님 휘는 금(襟)인데 통정대부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셨고 조부님 휘는 여(礪)인데 첨지중추원사를 지냈으며 아버님 휘는 자청(自淸)인데 함길도관찰사를 지내셨다.어머님은 모관(某貫)모씨(某氏)이다

1507년에 생원 진사과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박사로부터 사헌부 감찰을 배수하였다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여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부모님 묘소가 백암산(白岩山)심곡 중에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지금도 그 곳을 하 감찰 시묘동(侍墓洞)이라 전한다. 뒤에 통훈대부 경산(慶山)현령을 배수 하였다. 그 후 장차 사화(士禍)가 일어날 조짐을 보고 벼슬할 뜻을 버리셨다,일찍이 이소도(二疏圖)를 지어 이르기를「백발이 능히 총애를 온전히 하였으니 황금은 어리석음 벗지 못하네 한양 백냥객(百냥客)들 그 속에 바라볼 자 없네」하였으니 그 식견을 엿볼 수 있다. 공이 젊어서 관찰사공을 모시고 운곡(雲谷)으로부터 안계(安溪)로 옮기어 살다가 모년(某年) 3월 1일에 돌아가시어 안계촌(安溪村) 좌편 계좌(癸坐)에 묻히셨다. 배위는 숙인 진주 정씨(晋州鄭氏)이니 생원 함지(咸之)의 따님이요 이조정랑 하승호의 외손녀인데 8월7일에 돌아가시어 합봉되었다

아드님은 5형제인데 장남 보용(保溶)은 진사로 사헌부 감찰이 되셨다. 보완(保浣)은 진사 삼남 보순(保淳)과 사남 보윤(保潤)은 모두 생원이요 오남은 보인(保寅)이며 사위 두 분은 사인(士人) 허송죽(許松竹)과 생원 정수(鄭壽)이다 보용 아드님은 철부(哲夫)인데 장사랑 참봉이요 보완 아드님은 수원(水源) 영원(永源)이다 보순 아드님은 기붕(起鵬)이다 보윤 아드님 경원(景員)은 진사요 그 이하는 경주(景周) 경심(景深) 경회(景懷)경릉(景陵)이다 보인 아드님은 여정(汝艇)이다 손자사위와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지금에 와서 공의 시대가 400년이라 문헌이 오랜 새월 잔결(殘缺)하여 벼슬에 계실 때의 치적을 상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족보에 실린 바가 약간 있은 뿐이나 생졸 연대와 사적의 본말(本末)이 또한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그 아까움을 이루 다 말하겠는가? 이에 그 가까스로 전해지는 바에 의거하여 돌에써서 묘 지킴으로 삼으니 뒤에 비록 능곡(陵谷)의 변함이 있을지라도 깊이 눈여겨보지 않고도 옛 어진대부의 무덤인줄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