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덕랑(通德郞) 하경량(河景量) 18세손

우리 세종 시대의 번성하였을 때에 경재 선생 하 문효공(文孝公)과 황 익성공과 허 문경공 같은 분이 계시어 앞뒤로 정승이 되시어 돕고 간(諫)하고 하여 한 세대를 당우(唐虞) 시대로 올려 5백 년의 휴명(休明)한 국운을 열게 되어 그 높은 공훈과 위열(偉烈)이 진실로 이미 이정(彛鼎)에 새겨지고 종묘에 배식(配食)되었다. 그 흐르는 복은 커서 자질(子姪)들이 번성하였는데, 통덕랑(通德郞) 휘 경량(景量) 자 자대(子大)는 그의 6세 손이시다. 어려서부터 자성(姿性)이 관홍(寬洪)하시고 흘연(屹然)히 거인의 형상이 있으셨으며, 장성하셔서는 넉넉히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뜻을 가다듬어 글을 읽으셨는데, 당시에 백형(伯兄) 경수(景受)께서 조정에 벼슬하여 고을 원을 역임하실 때 두 아우님은 모두 어려 가정 일을 잇지 못하셨으므로, 공이 안팎으로 응수(應酬)하여 집안 일을 감독하시게 되니, 그의 과거 공부에 여가를 낼 수 없었으나, 역시 편안히 스스로를 지켜 세상의 명리(名利)를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

부모님 섬김에 효도하시어 살아서 봉양함과 장사하고 궤사함에 정성을 다하시지 않음이 없었고, 한 달이면 반드시 두 번 성묘하여 늙을 때까지 폐하지 않으셨다. 친척 대함을 인(仁)으로 하고, 식솔 거느림을 용서로써 하며, 자제들에게 직책을 나누어 주어 성공하는 것으로 책임 입지 않으시며, 마굿간에 좋은 말을 기르지 아니하시고 이르시길, 「우리 가법을 무너뜨릴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셨다. 날마다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고 거하시고 경적에 잠심하여 성(性)을 존양(存養)하시며, 능히 다스림의 요결을 공부하여 사물에 대처함에 의리에 합치하기를 힘쓰시고, 이익의 유혹으로 나아가지 않으시며 위협으로 물러나지 않으셨다.

공이 빛을 초야에 묻어 명위(名位)가 세상에 표현됨이 없었으나, 그러나 몸을 이끌고 행동을 경계한 실상을 보아 스스로 가정의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 세대가 멀고 문적이 흩어져 그 상세한 증거를 얻을 수 없으니, 아깝도다. 하씨는 진양에서 계출(系出)하여 고려 사직 휘 진(珍)께서 시조가 되시는데, 대대로 벼슬을 이어, 송헌 선생 원정공 휘 즙(楫)과 진산 부원군 휘 윤원(允源)과 병조판서 목옹공 휘 자종(自宗)에 이르러 3대가 훈업(勳業)과 절의(節義)의 현저함으로 고려사와 해동충의록에 실려 있다.

문효공 3세의 매계공 휘 한우(漢佑)는 충무위 사직이신데, 집안 형님(宗兄) 한보(漢輔)가 세력을 믿고 오만을 피우다가 경패(傾敗)의 상태에 이름을 보시고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이사하여 강양(江陽)의 야로현(冶爐縣)에 거주하셨다. 그분 아드님 성재(惺齋) 휘 천수(千壽)는 참봉으로 좌승지(左丞旨)에 증직되셨으며 문학과 행의(行誼)로 그 시대 제현(諸賢)들의 추중한 바 되셨는데, 이분이 공의 아버님이시다. 선비는 순창 설씨이니 : 옥천군 계조의 후예이시요, 교위 광범(光範)의 따님이시다.
공이 선조 정축(1577)년에 탄생하시어 인조 신미(1631)년 8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오십 오 세였는데, 현서 무시랑 신좌에 묻히시었다. 배위는 일선 김씨이니 : 안경(安慶)의 따님이요, 점필재 문효공의 후예인데,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부덕이 있으셨다. 아드님 3형제는 진문, 진장, 진명이요, 사위 두 분은 이 흡, 문 재주요, 손자 네 분은 우성, 필점, 필연, 필원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번성하여 기록지 못한다.
공의 후손 치원(致源)이 문중 어른들의 명으로 나에게 새길 말을 맡기는데, 내 스스로가 늦게 나고 들음이 적은 사람으로 족히 유잠(幽潛)함을 발양(發揚)할 수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였으나, 청함이 그치지 않으므로, 삼가 가전(家傳)으로 미루어 쓰고 이에 명(銘)한다

문효공의 예범이요, 모헌공의 의규(義規)로다.

내 아름다움을 가졌으니 무엇을 한들 마땅하지 않으리요?

자연 속에 묻혔으나, 스스로 사람의 의륜을 다하셨네.

곤곤한 백세에 끼침 없지 않으리라.

돌을 깎아 글을 새김은 후래에 밝힘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