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하홍수(弘秀) 18세손

공의 휘는 홍수(弘秀)요 자는 백임(伯任)이요 성은 하씨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그 선조(先祖)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조는 휘 진(珍)으로 고려조에서 사직(司直)을 지냈다. 그 뒤를 이어서 이름난 분으로는 진천부원군에 봉해진 원정공(元正公) 휘 즙(楫)과 진산부원군에 봉해진 고헌공(苦軒公) 윤원(允源)과 군부상서를 지낸 목옹공(木翁公) 휘 자종(自宗)과 대사간을 지낸 휘 결(潔)과 은일(隱逸)로 공조참의를 지낸 휘 금(襟)이 계셨는데 모두 공의 5대조 이상이다 고조의 휘는 순(淳)인데 인데 중추원사를 지냈고 증조는 휘 경연(景沇)인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정읍에서 해남으로 처음으로 옮겨 살았다. 조고(祖考)의 휘는 기남(起南)으로 장사랑이요 황고(皇考)는 휘가 관(灌)인데 통덕랑이다 황비(皇비)는 공인(恭人)인데 성씨를 모른다.

공은 1579년에 문과에 올라 기주관(記注官)으로 뽑혀 들어가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였고 또 언관(言官)으로서 일을 논하였는데 같이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그 뒤 초계현감에 제수되었다 공이 임지로 부임하려고 떠날 때에 조정의 사대부들이 서울의 성문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면서 공이 내직 으로 돌아오는 것이 혹 늦어질까 걱정하였다 고을에 부임하여서는  자신의 이상을 펼쳐 잘 다스리니 관아의 백성과 이속들이 그 덕과 의리를 노래하였다 족숙되는 모헌(募軒) 혼(渾)이 이웃 고을 합천에 살았는데 자주 가서 경서의 뜻을 물었다 그 뒤 순안현령으로 옮겼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치적이 많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목천현감으로서 군사를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워 큰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공은 평소 허약하고 신병이 있어 관직에서 별세하였다. 임금이 장차 크게 쓰려고 했으나 몇 고을을 맡아 다스리면서 그 재주를 다 시험해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애석한 일이로다 뒤에 가정대부 이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은 효성이 출천했는데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부모의 뜻과 몸을 다 잘 받들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두 차례 다 시묘살이를 했다. 배위(配位)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오위도청부 부장(部將)을 지낸 응문(應文)과 응구(應九)와 통덕랑 응태(應兌)이다 응문의 아들은 손(遜)과 우인(友仁)이고 응태의 아들은 봉태(奉台)이다 산소는 해남군 마포면 월암리 흑산 묘좌(卯坐)의 언덕에 썼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고 4년후 1914년에 후손 권만(權萬) 권용(權庸) 권규(權奎) 등이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묘문을 새겨 세웠는데 1950년 6월25 동란 때 유탄에 맞아 파손되었다. 이제 도로구획으로 말미암아 영암군 서면 재경동 간좌(艮坐)로 이장을 하게 되어후손 행래(幸來)가 공의 사장(事狀)과 옛 비문을 가져와 나에게 갈명(碣銘)을 청함으로 이에 명(銘)한다.

진양의 하씨여! 칡넝쿨처럼 뻗어 온 나라에 퍼져 호남에까지 이르렀네.

공이 세상에 쓰이어 잘다스려 백성들이 살아났네.

치적이 아주 많았으니 자혜롭고 현명했다오.

섬 오랑캐의 난리에 목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네.

세상 떠난 뒤에도 잊지 않아 참판에 추증했네.

처음에 해남에 산소 들였다가 산천이 변하여 옮기게 되었네.

영암땅으로 옮겼으니 천년토록 길지(吉地)라네.

오랜 세월 지나고 보니 집안 역사도 많이 유실되었네.

그 사실에 근거하여 내가 명을 지어 새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