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사공(同知事公) 하덕원(河德源)18세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오직 효성이 있어야만 형제에게 우애하고 정사에 베품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소위 효도란 행동의 근원이요 선(善)의 으뜸인 것이다. 한 번 인륜(人倫)이 쇠미하여진 후로 세상에 독실하게 실천한 자가 드물었는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된 하공(河公)께서 능히 그 도를 다하였다. 공의 휘는 덕원(德源)인데, 진양(晋陽)이 관향이다.

우리 하씨는 고려 때에 명현들이 잇따라 일어나 동방의 성족(盛族)이 되었다. 목옹(木翁) 선생은 고려가 망할 때 즈음하여 71현과 두문동(杜門洞)에 숨으셨거니와, 다섯 아드님을 두셨는데 도학이 모두 엇비슷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된 휘 부(溥)가 막내 아드님인데, 고양(高陽)목사로 있을 때 대쪽같이 바르게 처리하므로 이름나서 소부(召父)와 두모(杜母)의 칭송이 있었으니, 이 분이 공의 6대 조부이시다. 5대 조부는 정서(呈瑞)인데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고조는 연(漣)인데 참봉이요, 증조는 영호(永浩)인데 통덕랑이다. 조부 운(雲)은 첨정인데 임진난에 순절하여 2등공신이 되었다. 황고는 경록(景錄)인데 통덕랑이요, 선비는 영인(令人) 해미 곽씨(海美郭氏)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천성에서 우러난 효성이 있어 화(和)한 모습으로 부모님 뜻을 살리고 따르기를 어김 없게 하였고, 바깥 글방에서 공부하면서도 아침저녁 문안을 한결같이 하였다. 점점 장성하여서는 옷은 가볍고 따스한 것으로 드리며 식사는 맛있는 것으로 드려 뜻과 물질을 아울러 봉양하고 병환을 간호함에 있어서는 의원에게서 약을 얻고 산에 빌되 풍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춥고 더움으로 주저하거나 하지 않았으며, 열흘이 가고 한 달이 되어도 편안히 눈을 붙이거나 옷을 벗거나 하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3년 동안 의례(儀禮)에 있어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가례를 따랐으며, 초상 때의 모든 도구에 있어 반드시 김문원(金文元)의 법제대로 행하였다. 시묘살이를 할 땐 집의 개가 가서 호위하였다. 삭망에 집에 돌아가 곡할 때와 제사 때에도 중문을 들어서지 않았다. 생선과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아 수척하여 뼈만 남았었는데, 다음 상례도 이와 같이 하여 고을에서 여러 번 포상하기를 청하여 증직되는 은총을 입었으며 이 일이 효행록에 자세히 실려 있다.

글을 읽음에 원리가 정밀하게 살펴 투명해지지 않으면 그치는 일이 없었다. 시문(詩文)을 유창하고 조리있게 짓되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쓸 데 없는 일로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았으며, 포박자(抱朴子)가 이른 바 「영화와 권세 보기를 기숙(奇宿)하는 손님같이 한다」라는 말을 따르고 산수를 즐기시며 속세의 때를 벗어 던지었다. 끝내 좋은 옥이 궤에 담아지고 좋은 말이 팔리지 않음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 묘는 석화(石花) 석담(石潭) 내 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나주 박씨(羅州朴氏)이니, 통덕랑 제검(濟儉)의 따님이다. 묘는 이장하여 합봉되었다.

장남은 진명(震溟), 다음은 진영(震泳). 진홍(震弘). 진일(震溢)인데, 다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았으며, 진명의 아드님은 오(澳)와 상(相), 진영의 아드님은 순(洵), 진홍의 아드님은 청(淸), 진일의 아드님은 징(澄)과 준(浚)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참외를 심으면 참외를 얻음이 필연적 이치이니, 공의 효성과 학문을 어진 아들과 손자들이 이어받아 그 덕을 입음이 이와 같았다.
후손 상돈(相惇)이 일족들과 더불어 묘비를 세우려 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는 바, 내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어서 공의 선덕(善德)에 붓을 잘못 범할까 두려워 많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롱진 옷을 입고 땅에 엎디어 재롱 부리심은 노래자(老萊子)의 정(情)이었고, 부엌에서 찬을 만들고 방에 가서 문안하심은 동소남(童召南)의 정성이었다. 초상의 도구에 문원공(文元公)을 따르시고, 의례 범절에 주자(朱子) 가례를 따르셨다. 남은 힘으로 학문하여 문예를 능히 이루셨으니, 비석에 이 글을 새기나 어찌 능히 다 천명할 수 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