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랑공(正郞公) 하준인(遵仁)18세손

공의 휘는 준인이요 자는 청숙이요, 집안은 진양의 명문(名門)이다. 항고는 충순위 휘 현이요, 선비는 의인(宜人) 김해 허씨인데, 진사 흠의 따님이시다. 조부님은 별제 휘관이요, 증조님은 연일 현감 휘 구수이요, 고조님은 세자시직 휘 주이다. 그 윗대는 시직공의 비문에 실려 있으므로, 다시 쓰지 않는다. 삼가 유사(遺事)를 살펴 보옵건대, 공은 효우스러우시고 근검하시며 높은 대절(大節)이 있어, 무과(武科)에 발탁되어 정랑(正郞)에 배수되셨으나, 나아감을 깨끗하게 여기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시와 예를 즐기셨다. 뒤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중의 예를 잘 지켰으므로 널리 알려지셨다. 신묘(1591)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듬해에 왜란이 일어나, 형제님들이 오배산 선산 밑에 피난하여 살면서 예법대로 법제(法制)를 지킬 수 없어 밤중에 곡을 하였으므로, 지금도 그 곳을 효자동이라고 일컫는다.

일찍이 망우당 곽재우와 군책(軍策)을 논할 때 곽공이 알아주었다. 서천군(西川君) 정 곤수가 공의 형제를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끝내 회보(回報)가 없었으니, 역시 명(命)이었다. 정유(1597)년 3월 7일에 돌아가시어 옥야의 정극산 갑좌에 묻히시었다. 숙인(淑人) 언양 김씨는 헌납 눌의 따님이신데, 묘는 쌍분이다. 아, 한번 일어남에 정원(定遠)의 뜻을 두셨고, 여묘에 거하여 슬픔을 다함에 자고(子羔)의 어려움이 있었으며, 마침내 벼슬하셔서도 뜻을 펴지 못하셨으니, 충성을 베푸실 데가 어디였던가? 상중에는 난리를 만나 효도함에 한스러움 남기셨으니, 슬픈 일인지고! 이제 1906년 춘삼월에 나라를 잃게 되어 근본으로 돌이키려는 이 때 공의 후손 인병 등이 비를 세워 길이 전하려 하여 문중 조카 대룡을 시켜 글을 받들고 와서 묘갈명을 맡기므로, 그 행장에 의거하여 간추려 쓰고 이에 명(銘)한다.

풍랑(馮郞 : 인명)이 낭서에 굴함이여, 각자(인명)가 글에 돈독함이었네.

용이 시험하지 못하였으매 채찍치며 한탄하셨네.

깊은 산골에 피눈물 뿌리니 땅 이름이 효성 전하네.

아, 공론이 없어짐 없이 길이 두 분 무덤에서 편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