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부위수문장(展力副衛守門將) 하덕수(德洙)18세손

공의 휘는 덕수(德洙)인데 초휘는 덕수(德秀)요, 자는 중보(重寶)요, 하씨이니, 관향은 진양이다. 고려 사직 휘 진(珍)이 시조이 신 바, 계속 전해져 휘 즙(楫)에 이르러 진천(晋川) 부원군이 되시어 원정(元正)이라는 시호를 받으셨고, 그 아드님 휘 윤원(允源)은 진산(晋山) 부원군이 되셨으며, 휘 계종(啓宗)은 형조정랑(形曹正郞), 군사(郡事)를 지내셨고, 휘 척은 조선조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이 되시어 인하여 그 고을에 사시었다. 휘 맹질은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내셨고 청백리(淸白吏)로 지정되셨는데, 이분이 공의 5세 조이시다. 고조님 휘 주(澍)는 세자시직(世子侍直)이요, 황고 휘 황은 만호(萬戶)다. 선비는 김해 허씨(金海許氏)와 광주 이씨(廣州李氏)다.

공이 명종 원년 병오(1546)년 9월 13일에 출생하셨는데, 의연하고 특이한 모습이신지라, 만호공(萬戶公)께서 사랑하시어 올바른 방도로 가르치셨다. 장성하셔서는 만송 강 선생 염(晩松姜先生濂)을 좇아서 배우시어 조예(造詣)가 일찍 이루어졌는데, 겸하여 활 쏘고 말 타기를 익히시니, 명성이 자자하였다. 공이 처음 출세할 뜻을 가지긴 하셨으나 당파끼리의 알력이 있음을 보시고 스스로 걷어치우고 고요히 사시면서 아침 저녁 부모님을 모심에 정성을 다 바치셨다. 자신은 검소하게 절약하셨으나, 능히 이웃 마을의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을 두루 도와주셨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시작할 때 신중히 끝을 생각하셨고, 남을 상대할 때 진실로 대하여 꾸며서 함이 없으시니, 선행(善行)으로 당시에 크게 추중되셨다.

선조 경진(1580)년에 부친 명령으로 무과에 응하여 전력부위 수문장(展力副衛守門將)으로 발탁되셨는데, 이는 공이 무를 겸비하셨으나 우선 쉬운 것을 시험해 보신 것일 따름이요 그 본뜻은 아니었다. 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셨고, 복제가 끝난 뒤엔 경서 번역을 일삼으셨다. 임진(1592)년 왜란을 당하여 공이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셨으나 춘추 많으신 자당이 계셨으므로,그 보호만을 도모하셨다. 정유(1597)년 재란때는 공이 이미 병환으로 수월간 고생하시던 중이라, 나라를 근심하여 한을 머금고 별세하시니 : 곧 정유(1597)년 5월 29일이요, 연세는 52세였다. 전쟁이 한창 심할 무렵에 별세하시어, 초계 앙진산유좌에 안장하였다. 장례 안날부터 비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행상할 때는 개었다가 장례를 마친 후에 또 풍우가 시작되니, 사람마다 이상하다 여겼다. 배위는 의인(宜人) 진양 강씨이신데, 필주(弼周)의 따님이시다. 공이 별세하신 후에 돌아가시어 창녕 관곡 뒷산 유좌에 안장 되시었다. 아드님은 협(浹)이요, 손자님은 충립(忠立), 의립(義立), 예립이요, 충립 아드님은 정민(淨旻)이요, 의립 아드님은 계원(繼源), 후원(厚源), 종원(宗源)이요, 예립 아드님은 종해(宗海), 종회(宗澮), 종위(宗渭)다. 후손 재찬(在纘)이 증손 대성(大成)과 함께 공의 후손과 같이 의논하여 공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자 할새 가장(家狀)과 대대로 전해져 오는 문적(文籍)을 나에게 보이고 그 명(銘)을 청하기로, 내 위와 같이 쓰고 이어 명한다

선비의 물러가고 나아감은 오직 집권자의 어질고 사특함에 매인 것이라.

수문 벼슬이 비록 낮으나, 오히려 성을 전담하는 책심이 있었도다.

이미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산수에 노닐어 자적(自適)하셨도다.

임란에도 오직 부모 호위함을 도모하셨고,

죽도록 나라 걱정하는 마음 잊지 않으셨도다.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적막한 앙진의 무덤으로 돌아가셨고녀.

산은 고요하고 달은 넘어가니, 차가운 냇물 소리 뿐이로세.

이 비석은 천년토록 한이 맺혀 이지러지지 않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