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무성(寧無成) 휘(諱) 응도(應圖)선조님의 묘소 :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하리 다간
    

 
하응도(河應圖) 19세손

墓誌銘

남명 조식(南冥曺植)선생이 덕산(德山)에서 도(道)를 강론하실 때 당시의 어진 선비들로 그 문하에 들어가 직접 가르침을 받아 덕을 이루어 인재가 되 분이 많은데. 영무성(寧無成)선생이 그 한 분이다 조식선생이 돌아가시매 공이 당신의 전장(田庄)100 묘(묘)의 땅을 내놓아 사당을 지어 봉향(奉享)하였고 벼슬살이로 수십년을 옮겨다닌 끝에 덕산으로 돌아와 사당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사셨고 돌아가셔서는 그 뒷산 유좌(酉坐)에 묻히셨다 옛날 자공(子貢)이 공자가 돌아가시매 공자 무덤 가에 집을짓고 혼자 3년을 산 데 대하여 맹자(孟子)가 특서(特書)하여 전(傳)하지만 이것은 오직 3년이었을 뿐이었으며 공은 처음부터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 줄곧 덕산에 계셨으니 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세상에 사제간(師弟間)이 된 자 공을 본받을 지어다. 영무성 선생의 묘비(墓碑)가 없기로 후손 정규(靖奎)와 진배(晋培)가 나를 찾아 와 비문(碑文)을 청하는데 대군자(大君子)가 있어 공을 빛내야 할 터인데 이 일을 어찌 나에게 시키는고?

공의 휘는 응도(應圖)요 자는 원룡(元龍)이요 성은 진주 하씨니 중정대부(中正大夫) 사직공(司直公) 휘 진(珍)의 후손이시다 8대 이후로 원정공(元正公) 휘 즙(楫)과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휘 윤원(允源)이 계셨는데 다 명덕(名德)으로 고려사(高麗史)에 빛나 있다. 고조 증조 조부 선고님 4대에 있어서 휘 맹산(孟山)은 부사이었고 휘 윤형(允亨)도 부사(府使)였고 휘 승호(承灝)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였고 휘 박(泊)은 부장(部將)이었다 선비(先批)는 찰방(察訪)강봉산(姜奉先)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준수하여 보는 이는 모두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일찍이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어 그 대의(大意)를 다 뚫어 알았고 나이20에 조선생(曺先生)을 사사(師事)하여 성리학(性理學)을 들으매 흔연히 즐거워하고 강론에 세월을 허술히 하지 않았으니 동문(同門)의 오덕계(吳德溪) 최수우(崔守愚) 김동강(金東岡) 정한강(鄭寒岡) 하각재(河覺齋) 조대소헌(趙大笑軒) 유조계(柳潮溪)등 어진 선비들이 마음 속 깊이 추중(推重)하였다. 조선생(曺先生)이 공에게 사상례(士喪禮)책 한권을 주며「내가 죽으면 이로써 상(喪)을 치르라」하시고 위독하였을 때 또 거듭 유언하니 드디어 말씀대로 삼가 봉행(奉行)하였다, 그 뒤에 아버님 부장공(部將公)상을 당하여서도 조 선생 치상(治喪)한 것과 같이 치상하였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날 때에 권귀(權貴)들이 이를 기화로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하려 함에 최수우(崔守愚), 유조계(柳潮溪)가 전후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공께서 연원 이광정(延原李光庭), 월사 이정구(月沙李廷龜)에게 글을 보내어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소 염습(斂襲)시키어 관을 날라 반장(返葬)하였다.

이에 앞서 1588년에 공께서 최수우, 유조계와 함께 이운당(李雲塘)의 문병(問病)을 간 일이 있는데, 운당이 말하기를 「공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오. 수 년에 지나면 반드시 내가 먼저 죽은 것을 부러워하리어니와 화를 면할 자는 오직 신도반(申屠蟠), 곽임종(郭林宗)같은 사람일 뿐이다」하였는데, 이 말은 아마도 공에게 옛날 중국 신도반, 곽임종같이 중도(中道)를 취하여 화를 면하기를 당부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과연 들어맞는 말이 되었다.

공께서 젊으실 때 진사(進士)가 되어 명망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세상 형제가 날로 험악하여짐을 보고 더욱 출세할 뜻을 갖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공의 행실이 의로움을 듣고 금화사별좌(禁火司別座)와 장원서(掌苑署)별좌와 소촌역승(召村驛丞)과 사근역승(沙斤驛丞)과 진주판관(晋州判官)과 능성현령(綾城縣令)과 예산현감(禮山縣監)에 임명하였고, 그 사이 산성별장(山城別將)에 임명된 바 있는데, 이는 어사 이시언(李時彦)의 차관(差官)이었거니와, 이 모두 임진왜란 이후로 국사가 창황할 때에 공의 급난을 구하는 재능을 알고 왕이 특지(特旨)로 부름이거나 또는 대신들이 논하여 천거함이었다. 공께서 나라의 은혜와 처우(處遇)에 감격하여 난리 속에 왕래하며 기무(機務)를 도우니, 나라에 힘이 되었다. 정사(政事)를 처리함에 오로지 억강부약(抑强扶弱)에 힘쓰니, 교활한 강자(强者)들의 미워함이 많았다.

이런 고로 문망(文網)의 혐의를 입은 일이 있으나, 정승 이완평(李完平)이 조정에서 강력히 변호하여 무사하게 되었다. 공께서 능성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공이 타던 말이 역말(驛馬)과 교미(交尾)한 바 있어, 망아지를 낳았는데, 공께서 「말이 나라 말이니, 내가 사유(私有)할 바 아니다」하고 놓아두고 떠나니, 사람들이 이를 유독(留犢)의 고사(故事)와 견주었다. 공께서 1540년 3월 17일에 출생하여 1610년 2월 2일에 돌아가셨으며 1718년에 대각서원(大覺書院)에 제향되셨다. 문집 약간이 집안에 간직되어 있다,
마나님 밀양손씨(密陽孫氏)는 교위(校尉) 영(翎)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고, 공과 합봉으로 묻히셨다. 아드님들 휘는 홍로(弘魯), 홍진(弘晋), 홍업(弘業)이다. 휘 홍로의 외아드님은 휘 신기요, 세 분 사위는 강의, 이중록(李重祿), 강침(姜琛)이다. 휘 홍진의 두 아드님은 휘 신언(愼言), 신행(愼行)이다. 이 밖은 기록하지 않는다. 이에 명(銘)한다.

선각(先覺)한 남명(南冥)선생이 이 나라에 도를 펼 때

가르침 주고 받음 물 마시어 충만한 듯.

공께서 처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 곳을 밝히시고 높은 지식 지켜셨네.

백성을 보살피고 환난을 막음에 누가 공(功)을 겨루리오.

후세 사람이 높이 경앙(敬仰)함을 떳떳이 같이 하니,

남기신 가르침은 무궁히 이어지리.

 

휘(諱) 응도(應圖) 行將

선생의 휘는 응도(應圖)자는 원룡(元龍)성은 하씨이니 진주인이다, 고려 중정대부 사직공 휘 진(珍)이 시조이고 8세를 지나 시호 원정(元正) 휘 즙(楫) 진산부원군이 계시고 윤원(允源) 부자가 함께 고려말의 명신(名臣)이었다 고조는 현감 휘 맹산(孟山)이요 증조는 충순위 휘 윤형(允亨)이요 조부는 중추부사 승호(承灝)요 아버님은 부장 박(泊)이며 어머님은 찰방 진주강봉선(姜奉先)의 따님이니 1540년 3월19일에 신풍리에서 나셨다. 용모가 뛰어나 예의범절이 높으며 어려서 모든 아이들과 놀 때 몸은 닭무리에 봉(鳳)이 서있는 것 같았으며 고을의 어른들과 더불어 말할 때 그 응대하고 경민한 말솜씨는 반드시 대인(大人)될 것이라 말하였다 일곱 살에 비로서 배움에 나가 진퇴와 주선의 움직임을 소학(小學)의 절도를 지키며 열너댓 살에 이미 사자오경(四子五經)을 익히고 그 대의(大義)애 통달(通達)하였으며 열여섯 살에 남명조식(南冥曹植)선생에게 청하여 그 문하 들어가셨다,


조선생은 기량(器量)이 중하시어 이끌어 가름침이 심히 간절한지라 이에 성리(性理)의 설을 듣게 되어 흔연히 즐겨하셨다,해가 갈수록 강론에 나가심이 그치지 않으시니 산천재(山川齋) 남계원(濫溪院) 지곡의 계속사(繼俗寺)등과 그리고 임갈천(林葛川)의 정사(精舍)는 모두 쫓아 노신 곳이다 조선생이 일찍이 손수 사상례책(士喪禮冊) 한 권을 써서 공에게 주어 말하기를「내가 죽으면 이로써 상(喪)을 다스리라」한대 그 병이 더하여 역책(易策) 함에 미쳐 공이 드디어 지켜 행하기를 오직 근신으로 하셨다, 후에 문하 제생과 더불어 조선생을 시축(尸祝)하기 위하여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할 때 그 터 수백 묘(묘)는 모두 공의 땅이던 바 허납하고 몸소 역사(役事)를 동독(童督)함에 게으름이 없으시니 그 숭보(崇報)의 정성을 다하신 것이로다 곧 선고(先考) 부자공(部將公)의 상을 당함에 역시 조선생이 준 바 예법으로 상을 다스리고 인하여 여묘에서 3년을 마치셨다.


먼저 공은 선공(先公)의 명한 바로 남은 힘으로 공부 하던 중 계유년에 진사가 되셨다. 복제(服制)를 이미 다 함에 어머님에게 아뢰어 벼슬길을 그만두고 밭갈고 낚시 함으로써 봉양하니 그 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어버이를 섬기엔 마땅히 하효자(河孝子)와 같을지라」하더라 선생이 그때 더불어 노신 바 벗으로 오덕계(吳德械) 최수우(崔守愚) 정한강(鄭寒岡) 김동강(金東岡) 조대소헌(趙大笑軒) 하각재(河覺齋) 이죽각(李竹閣) 정약포(鄭藥圃) 유조계(柳朝溪) 진백곡(陳栢谷) 강개암(姜介菴) 정매촌(鄭梅村) 임금산(林錦山)등은 모두 일대(一代)의 명현(名賢)들이니 서로 널리 사귀셨다 무자년에 미쳐 최수우 하각재 유조계 공과 더불어 이운당(李雲塘)의 문병차 갔던 바 운당이 말하기를「내가 먼저 가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 수 년이 지나면 오히려 나를 부러워 하리니 면(免)함을 얻을 자는 오직 신도반(申屠蟠) 곽임종(郭林宗)의 무리일 것이다」하니 아마도 공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기축년 옥사가 일어남에 그 말은 과연 징험이 있어 유조계가 이미 무고(誣辜)함을 입어 죽고 최수우 또한 갇히게 됨으로 공은 글을 전하여 줄 것을 확약하였으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최수우가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공이 몸소 보고 거두어 그 관(棺)을 가지고 돌아 오셨다.

임진년 정월에 선비(先비)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여 법제(法制)지키기를 전과 같이 하고 그해 4월에 왜구(倭寇)가 크게 들어와 독적함으로 공은 빈소를 모시고 두류산에 들어가 난을 피하고 그 다음 해에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在祐)의 군사만 홀로 온전하였는데 조대소헌이 말하기를 「내 벗 하원용(河元龍)이 족히 일면(一面)을 맡을 만하다」하고 서찰로써 나와 같이 일할 것을 권하였는데 공은 나갈 수 없다 하여 사례하였다. 상복을 이미 벗음에 조정에서 그 명성을 듣고 천거하여 4월에 금화시벽좌를 제수하고 11월에 소촌승(小村丞)을 제수하였는데 을미년 정월에 사양하고 돌아오셨다.

병신년에 진주목사 나정언(羅廷彦)이 정개산성을 쌓을 때에 공으로써 별장(別將)을 삼아 관할케 하였으며 체찰사 이완평(李完平)이 또한 공역(公役)을 맡았으니 일이 다 끝나기 전에 조종에서는 장원서별좌(薔苑署別座)를 제수하니 이것이 정유년 5월의 일이었다. 그 해 7월에 또 사근성을 제수하였는데 공이 행하여 이르지 아니하여 체찰사가 보고 진주가 성(城)이 함락된 후로 수습이 매우 어려운지라 공이 능히 진무할 재능이 있다고 조정에 청하여 진주판관에 봉하였다.공은 명을 받은 즉시 영장(營將) 강덕룡(姜德龍)과 더불어 함께 지키기를 꾀하였으니 조치가 미치기 전에 적봉(賊鋒)이 난입(亂入)하여 군중이 모두 해산하는지라 또 새로 온 목사 이현(李玹)과 더불어 다시 소집함을 꾀하였으나 또 크게 왜구의 침략하는 바 되니 공은 드디어 삼가(三嘉)의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에게 의지하여 가셨다.무술년 4월 어사 이시언(李時彦)이 차관(差官)으로 부르니 이로부터 편의(便宜)를 따라 항상 옮겨 다니셨다. 기해년 5월에 능성현령을 제수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여 직책을 수행할 때 외롭고 약한 자를 어루만지고 강하고 교활한 자 치기를 굽히지 아니함으로 벼슬아치들의 무고한 바 되어 파직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송별하였다.

공이 타던 말이 역(驛)의 말과 교접하여 망아지를 낳으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나라의 말이 난 바라, 내 감히 사사로이 할 바 아니라」하시고 두고 돌아오실제 의론은 유독고사(留犢故事)에 비하더라. 후에 완평 이상(完平李相)공이 벼슬아치들의 그릇 됨을 임금에게 밝혔더니 계묘년 5월에 특히 예산현감을 제수하였다. 공은 능성에서 사직하고 돌아온 후로부터 때에 합당치 않음을 알고 수군(水軍)을 채우지 못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갑진년 3월 이정원(理呈原)에 나아가 풀림을 얻고 인하여 임명함이 있었으나 공은 스스로 산림의 자취로서 한 번 나가 이름을 더럽히고 문득 문법의 마친 바 되었다 하고 드디어 나아감은 깨끗지 못하다 하여 크게 돌아와 영무성(寧無成) 세 글자로 재(齋)의 이름을 삼으니 대개 이르기를 「그 의(義)를 잃고 벼슬에 나아감은 차라리 물러나와 자신을 지켜 이룸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함이었다.명(銘)을 지어 스스로 경계해 이르기를 「망녕되지 않은 말은 성(誠)에 드는 처음 길이요 스스로 속임이 없음은 공경(恭敬)하는 관문이라. 공경하고 정성하면 성현됨이 어찌 어려우랴? 백체를 기꺼이 고요함을 좇으면 능히 편안할 것이리라. 대도(大道)가 여기 있나니 바라는즉 안자(顔子)로다」하고 아침 저녁으로 대하여 바라보며 가슴에 새겨 잃지 않으시고 오직 마음을 선존현(先尊賢)의 일을 기술함에 다하고 세보(世譜)를 수리(修理)하시고 유문(遺文)과 연고(聯藁)로 원고(原稿)를 만드셨다.

정한강과 더불어 서계원(西溪院)을 창건하여 오덕계(吳德溪)를 배향하고 남계원(南溪院)에 배알하였으며 옥계(玉溪)에 처하여서는 강개암(姜介庵) 사당을 세웠으며 덕천서원(德川書院)이 병화로 훼손된 즉 제현(諸賢)과 더불어 중창함을 꾀하여 최수우(崔守愚)를 배향하였다.
무신년에 이르러 덕산 대법촌(大法村)에 안주하시니 아울러 선농(先壟)에 의지하는 땅이 되어 경술년 2월 2일 덕산정사(德山精舍)에서 돌아가셨다. 노병을 당한 때에도 배우러 오는 자 있으면 오히려 가르치기에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 임종에 이르러 내외를 안정하라 하시고 이르기를 「내 조화를 한 번 보고자 한다」하시고 드디어 자리를 바로 하고 유연히 가시니 향년 71이라. 윤 3월 13일에 덕천후록 부장공(部將公) 묘 왼쪽 유좌(酉坐)에 장사하고 숙묘 무술년에 고을사람들이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되셨다. 배(配)는 숙인 밀양손씨(密陽孫氏)이니 교위 영(翎)의 따님이요 二男을 낳으시니 홍노(弘魯), 홍진(弘晋)이요, 다른 아들은 홍업(弘業)은 二男이니 진해(振海), 제해(濟海)이며, 증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함이라. 대개 공은 태어나신 바탕이 아름답고 뜻을 행함이 독실하며 일찍이 남명(南冥)을 스승삼고 또 제현(諸賢)과 더불어 성리학(性理學)을 강명하고 경리학(敬理學)을 학습하여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을 한결같이 예법을 지키고 베품에 한 치의 어김이 없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살아선 봉양하고 돌아가사매 상(喪)을 지키니 자식의 직분을 다한 것이요, 임금을 섬김에 난(亂)을 물리치고 백성을 살렸으니 신하의 직분을 다하신 것이로다. 스승을 높이고 벗과 사귐에 이르러 한결 섬기는 도(道)로 이루면 서로 긍휼하는 마땅함은 모두 규범에 합당하여 마땅하지 아니 함이 없는 즉 이 어찌 평일에 격앙하고 진발(振拔)의 힘이 스스로 와서 충광(充廣)함이 있고 독실의 효험은 곳에 따라 패연(沛然)하여 그 임종에 이르러 정(正)을 얻어 세상을 뜨시니 이 같음이 아니겠는가? 돌아보건대 연대가 멀고 유문(遺文)은 흩어져 거의 없고 다만 약간의 책이 집안에 소장된 바는 한이 될 일이나 백세사림(百世士林)의 숭봉(崇奉)하는 바 스스로 있으니 어찌 반드시 많아야만 되는 것이리요? 공의 출계손의 후인 현(舷)이 그 아들 협(協)으로 하여금 유사(遺事) 등속을 가지고 나에게 행장(行將)을 청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이와 같이 쓰노라.

 

산청선비<영무성 하응도> 남명위해 덕천서원 부지 희사

                       
 1572년 남명이 세상을 떠나자,장례 절차는 남명이 생전에 제자 하응도, 손천우, 유종지 등에게 써 준 사상례절요(士喪禮節要:선비의 장례에 필요한 예의 요점만 모은 책)를 따랐다. 이로부터 4년 후, 다시 제자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德山은 선생께서 만년에 강학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그러니 선생을 위한 서원을 건립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수우당 최영경, 각재 하항, 무송 손천우, 조계 유종지, 영무성 하응도 등이 주축이 되어 곧 산천재 서쪽 삼리쯤에 도천(桃川) 위에 서원을 건립하니 곧 덕산서원(德山書院:후일 德川書院으로 改名)이다. 이 서원의 터는 원래 제자 영무성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땅이었다.16세때 남명의 제자가 되어 평생을 곁에서 모신 영무성 하응도는 이때 스승을 위해 땅을 흔쾌히 내 놓았다. 이렇게하여 덕천서원이 지금의 터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는 진주(晉州) 하씨(河氏)로 1540년(중종 35) 부장(部長) 박(泊)과 진양(晉陽) 강씨(姜氏) 사이에서 진주 신풍리(新 里:현재 진주시 대평면 신풍)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원룡(元龍)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라 7세때 소학을 읽고 그 절도(節度)를 익혔으며, 15세때 이미 사서오경을 대략 섭렵하였다. 16세때 남명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영무성을 본 남명은 그가 영민하고 또 물어보면 막힘없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여 매우 친절하게 가르치고 인도하였다. 이로부터 영무성은 평생동안 남명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남명을 곁에서 시종하면서 이 지역 선비들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남명선생과 영무성과의 관계는 남명선생 연보에 기록된 영무성 관련 기사(記事)가 적지 않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남명선생 연보에 언급된 영무성 관계를 살펴보자. 첫째는 남명선생이 남계서원을 배알할 때 선생을 모시고 강개암 하각재 유조계 진백곡 등과 함께 갔으며, 둘째는 남명선생이 지곡사에 있을 때 곁에서 머물며 모셨는데 노옥계 오덕계 김동강등이 함께 하였으며, 셋째는 남명선생이 갈천을 방문할 때 조대소헌 이모촌 옥계 개암 각재 조계 등과 함께 갔으며, 넷째는 남명선생이 퇴계선생 부음을 듣고 자신의 사후를 위해 사상례를 엮고 이를 주어 장례를 부탁하였으며, 다섯째는 남명선생이 장례때 사상례에 의거하여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16세때 남명의 문하에 들어와 24세때 남명을 따라 남계서원 배알을 한 것을 시작으로, 33세때 남명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19년동안 늘 남명 곁에서 직접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9세때 밀성(密城) 손씨(孫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26세때는 덕산에서 수우당을 만났다. 이때 서울에 살던 수우당 최영경은 남명의 명망을 듣고 지리산밑 산천재로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하러 온 것인데 나라에 국상이 있었으므로 죽순 한 묶음을 폐백으로 가지고 왔다. 수우당은 13세 연하인 영무성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아 보고 형과 아우처럼 서로 친하게 지냈다.기축(1589)년 정여립(鄭汝立) 옥사사건 때 수우당이 억울하게 연루되자 영무성은 그의 죄없음을 관계 요로에 편지를 하여 구출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수우당이 옥사하자 가서 시신을 수습해 가지고 돌아왔다. 34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을 하였다. 사마시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시험을 말한다.

본래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부친의 명으로 진사시에 합격을 한 것이다. 38세때 부친상을 당하자 3년상을 지극 정성으로 치렀다. 42세때 하동 신월촌(新月村)에 약간의 농장이 있어 이사를 하였다. 홀로 된 모친을 모시고 3형제가 효도를 다하며 우애있게 살았다. 44세때 동문들과 섬진강을 유람하고 덕천서원을 배알하였다. 52세때 모친이 돌아가시자 부친상과 같이 상을 치렀다. 53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리산 고은동(高隱洞)으로 들어갔다. 55세때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57세때 진주목사 나정언(羅廷彦)이 왜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개산성(鼎盖山城)을 축조하였는데 영무성을 별장(別將)으로 삼아 관리하게 하였다.  

58세때 다시 장원서 별좌, 사근(沙斤) 찰방에 제수되어 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곧 진주판관으로 옮겼다. 판관은 목사의 보좌관으로 종 5품직이다.계사년 전투로 진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된 뒤 민심이 흉흉하자 체찰사 이원익이 영무성의 덕망을 듣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정에 청한 것이다. 60세에 능성현감(綾城縣監), 64세때 예산현감(禮山縣監)등을 지내고 65세때 벼슬을 그만두고 하동으로 내려왔다. 59세때 고향을 떠나 수원 등지에서 살다가 벼슬을 하면서 보내다 이때 비로소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능성현감으로 있다가 돌아올 때 쯤 자기 말이 새끼를 낳았다. 그런데 그 말과 교접한 말이 역마였으므로 그 새끼는 자기가 사사로이 차지할 수 없다 하여 돌려주고 왔다. 그의 청렴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영무성은 서재를 지어 '寧無成'으로 편액을 달아 평생 지키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었다. 즉 "벼슬에 나아가 자기의 뜻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물러나 지조를 지키다가 아무 이룬 것이 없는 것이 낫다" 는 뜻이었다.

69세때 다시 덕산으로 들어와 살 곳을 정하였다. 덕산은 영무성이 어릴때부터 남명선생에게 글을 배우던 곳이다. 또 스승 남명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외지에 있으면서 항상 마음속에 둔 덕산 땅에 비로소 돌아와 만년의 삶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의 감회가 문집에 전한다. '덕산에 돌아와 살며'라는 시이다. '70세에 고향으로 돌아오니/ 쓸쓸한 생활 한 칸 초옥뿐이네/도화 뜬 맑은 물 예전과 같은데/ 다만 옛날의 선생 모습만 없네.' 늘그막에 덕산으로 들어와 남명 생에게서 글 배우던 때를 생각하며 지난 날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이듬해 태계(台溪) 하진(河 )이 와서 글을 배웠다.

당시 13세인 하진은 재주가 남달라 장래가 총망되던 사람이었다. 71세를 일기로 산사(山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후학들이 남명선생의 장례때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1718년 수곡의 대각서원에 배향되었다. 기자는 영무성의 유적을 찾아 우선 묘소로 향했다. 현재 삼장면 다간리에 있는 묘소는 후손들이 관리를 잘해오고 있었다. 묘소에서 재실 퇴수정(退守亭)이 있는 대평 당촌으로 향했다. 물어 물어 찾아간 재실은 인적이 끊겨 퇴락된 모습이었다. 영무성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지조를 지키며 살고자 하는 바람으로 이 집의 이름을 '퇴수(退守)'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영무성의 정신이 요즘 사람들에게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