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事公(봉사공)하흡(河洽)19세손

공의 휘는 흡(洽)이요, 자는 양여요, 성은 하씨요, 본관은 진양이니 : 고려 원정공 즙(楫)의 후예이시다. 조선조 때 청백리 맹질(孟姪)의 6세손이시요, 별제 관(灌)의 증손이시요, 충순위 현(舷)의 손자이시며, 참의에 증직되신 옥계공 휘 준의(遵義)의 아드님이시다. 선비는 이씨이니 : 습독관 몽남(夢南)의 따님이시다.

선조 을미(1595)년은 태어난 해요, 병신(1656)년 구월 25일은 돌아가신 날짜이다. 재력(才力)이 과인(過人)하여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하신 것은 천부적으로 뛰어나신 바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곧 훈련원 봉사를 배수한 것은 벼슬한 이력이며, 병자호란에 굴욕적인 화친을 한 날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기절(氣節)의 강개함이었다. 만년에 별장(別庄)을 지어 날마다 사우(師友)들과 노닐었음은 가슴에 품은 뜻이 담담 하였음이며, 불온당 성 창원(成昌遠)이 이별할 때 준 시에서 「헤아려 보건대 지난날 벼슬할 때의 맑은 품범은 만고에 이름 남기네.」한 것은 그 지조의 고결함을 말한 것이니, 이것이 골을 불후(不朽)하게 함에 족한 것이다.

합산방 모전의 해좌는 그의 무덤이요, 의인 달성 서씨 동언(東彦)의 따님은 그의 배위다. 4남을 두셨으니 : 자문(自汶), 자윤(自潤), 자징(自澄), 자명(自溟)이다. 이 비명을 청하러 온 사람은 그의 족손(族孫) 대룡(大龍)보인데, 후손 태주(泰周)씨의 부탁으로서이다. 이에 그 대개를 쓰고 명(銘)한다.

청백리는 윗대의 선조시요,

불온당은 절친한 분이었네.

기미를 보아 번연히 돌아가시니

맑은 풍범 드높은지고!

모전에 높이 솟은 것은 그의 무덤이요,

내가 비명을 새김은 후래 자손에게 고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