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군공(參軍公) 하대표(河大豹)선조님의 묘소 : 전남 화순군 이서면 보월리 영평
 

참군공(參軍公) 하대표(河大豹)19세손

공은 휘는 대표(大豹)요, 자는 일변(一變)인데, 1550년 윤6월 25일에 출생하였는데 자성이 총명하고 효성이 뛰어났다. 네 살에 어머님을 잃고, 일곱 살에 아버님을 잃었으니 아홉 살에 상복을 벗었으나 나이 어려 모친의 상복을 입지 못한 일을 한스럽게 여겨 상복을 3년 더 입으니 고을 원이 듣고 기특하다 여겨 몸소 가서 보고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땔나무를 해다 주게 하고 감사에게 알렸기로 이 일이 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바, 정한강(鄭寒岡)이 이 훌륭함을 예로써 대접하였다.

1592년에 공이 집에 있다가 난리가 일어났음을 듣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다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의주(義州)에서 임금에게 중흥소(中興疎)를 올리고 문밖에서 통곡하니, 선조(宣祖)가 크게 놀라 일어나 묻기를 「이 무슨 곡 소리인고?」하니, 옆에서 대답하기를 「호남 선비 하 모가 도보(徒步)로 올라와 글을 올리고 곡을 하고 있나이다」하므로 왕이 곧 불러오게 하여 인심의 거취(去就)와 적세(賊勢)가 어떠한가를 묻거늘 공이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있으니, 적이 비록 사나우나 걱정할 것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고, 또 민폐(民弊)에 대하여 말하기를 급하지 않은 세금과 생산되지 않는 공물(貢物)을 감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때 명나라 군사 20만이 평양을 점거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특별히 공을 병거(兵車) 6만을 위한 운량 도차원(運糧都差員:군량을 수송하던 관리)으로 삼으니, 공이 주야로 달려 3일 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왜군이 패했으므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군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고 공에게 말 한 필을 상으로 주고, 본국(本國:우리 조정)에 보고하기를 「예부터 충의 강개(忠義慷慨)의 선비가 초야(草野)에서 많이 나왔는데, 오늘의 공(功)은 하(河)모에게 많으니, 높이 써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가 공에게 묻기를 「그대의 원하는 것이 무엇인고?」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나라가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으니 나라 일에 죽을 뿐입니다」하시니, 왕이 감동하여 곧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에 제수하였다. 왕을 모시고 환도(還都)한 뒤에 여러 번 벼슬을 높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622년 3월 7일에 집에 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73세였는데, 서석산(瑞石山) 동쪽 영신(永信)에 장사되었다.

사람이 마땅한 일 즉, 충성이나 효행을 함에 있어서 어찌 대등한 사람이 없으리요마는 공과 같은 분은 어린나이로 부모상에 예를 다하였고, 심지어 추복(追服:상기가 끝났으나 복을 더 입음)까지 하였으니, 진실로 기특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국난을 당하여서는 분연(奮然)히 팔을 걷고 일어나 필부(匹夫)의 몸으로 천 리를 달려 임금께 상소하여 한 마디의 말로 임금을 감동시켰으며, 평민(平民)으로서는 운량(運糧)하는 일의 적임자가 아니었지만 서둘러 군량을 공급하여 명나라 군사가 주리지 않게 하였다. 이로써 큰 공을 세웠으나 호연(浩然)히 고향으로 돌아가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고 깊은 정조(貞操)를 보존하였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커서는 나라에 충성하였으니, 참으로 충효를 갖춘 분이로다. 다만 한 되는 일은 당시에 포상한 은전(恩典)이 오직 임금의 한 말씀에 그쳤고, 살아서도 공신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가서도 공신각에 들지 못하였으니 어찌 밝은 시대의 흠이 아니며 사림(士林)들이 애석해하는 바가 아니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