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進士) 하달해(河達海)20세손
 

경주 서면 용명리 원당침 임지원(壬之原)에 재상(宰相)의 봉분이 성균진사(成均進士) 진양하공 휘 달해(達海)를 모신 곳으로 이미 270여 년이 넘게 지났도다. 공(公)의 9세손 석기(錫基)가 종제(從弟) 석주(錫珠)를 보내 가문(家門)을 잇게 하니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할아버지의 무덤에 아직 묘비가 없으니 후손의 한이 오래니라」하시더라. 묘비를 세울 방법을 모색하여 원컨대 나는 선대(先代)를 살피어 익히고 천(阡)에 글을 씀으로써 어찌 후세에 고하지 않을쏘냐. 나 억(檍)이 또 공(公)에게 스스로 나아가 어찌 감히 말씀을 물어 글을 마치는 것이 옳다 하겠는가?

공(公)의 자는 약수(若水)요 진양하씨이고 고려조 사직공(司直公) 휘 진(珍)이 시조되시며 원조(遠祖) 일곱 분이 전(傳)하시고 8세조 휘 직의는 정용호군 증첨의정승(精勇護軍 贈僉議政丞)을 지내셨으며, 9세조 원정공(元正公) 휘 즙(楫)은 수충좌리공신(輸忠佐理功臣) 진주부원군(晋州府院君)이시며 호는 송헌(松軒) 시호 원정(元正)이시다. 10세조 휘 윤원(允源)은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이시며 호는 고헌(苦軒)이시고 역사에 전하기를 아들 휘 자종(自宗)은 호가 목옹(木翁)으로 병조판서를 지내셨으며 고려가 망하고 편안한 조선조에 아들 연(演)으로 하여금 귀현(貴顯)으로 증좌의정(贈左議政)에 증직되셨다. 12세 휘 연(演)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지내셨으니 호는 경재(敬齋)요 이명(異名)은 상저(相著), 시호는 문효(文孝)이시다. 조선조 문종(文宗)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또 오원(五院:합천의 신천서원, 진주의 종천서원, 문의의 우록서원, 무주의 백산서원, 장연의 반곡서원)에도 배향되었다. 대(代)를 이어 선조의 영령들이 후세에 이르러 13세조 장사랑공(將仕郞公) 휘 맹제(孟濟), 14세조 사직공(司直公) 휘 호성(好成)은 공의 5대조 이시다. 고조는 휘 한공(漢功)으로 내금위(內禁衛)를 지내시고 증조 휘 숙(淑)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내시고 영천(永川)에 처음 거(居)하셨다. 조(祖) 휘 설(設)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증직(贈職)되셨다. 고(考) 휘 경담(慶淡)은 좌찬성(左讚成)에 증직되시고 비는 정부인(貞夫人) 상주주씨(尙州朱氏)로 판서(判書) 상용(相用)의 따님이시다.

배(配)는 영일정씨(迎日鄭氏) 통정대부 세건(世健)의 따님으로 묘소(墓所)는 용명 도전곡 갑좌원(甲坐原)이다. 아들 보남(輔男)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공훈련참군(功訓練參軍)을 입(立)하시고 세 따님은 영산신씨(零山辛氏) 익우(益祐), 한양조씨(漢陽趙氏) 명도(命道), 창녕성씨(昌寧成氏) 생원(生員) 건수(健壽)와 각각 혼인하였다. 손(孫)은 세마(洗馬) 휘 사경(士鯨)이고 증손(曾孫)은 현감공(縣監公) 휘 왕(旺)이며 현손(玄孫)은 9세대가 이어지나 자세히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성품은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봉양함과 몰치(歿致:죽은 뒤에 저 세상에 극진히 보내드림)에 몸과 마음을 다하시고 도우(道友)에 정성(精誠)을 다하시니 일제(一弟)는 나눌 수 없는 얼굴과 같아서 형제애가 도타와 충만하니 즐거운 일이라. 1576년에 반궁(泮宮:제후의 학당)에서 진사시(進士試) 과거를 보던 중 동배(同輩)를 천거(薦擧)하여 장담(壯談)하니 별 일없이 진사(進士)를 취하매 이로 인하여 공에게 크게 공경의 예를 갖추더라.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회적산(晦跡山)에서 난을 평정한 공이 있으며, 날마다 경서와 사기로써 안빈낙도(安貧樂道) 소요자적하니 봉호지간(蓬蒿之間:쑥 따위 잡초가 우거진 곳)이라도 그에 몰입하면 세월 가는 줄 모르도다. 세상의 도의(道義)의 힘쓰고 극진함을 아쉬워하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구나.

옛날에 문효공은 사친이효(事親以孝)하고 나아가 사군이충(事君以忠)하니 기맥(氣脈)이 상전(相傳)하여 그의 가문을 업신여길 수가 없도다. 자고이래로 이를 도모하고 이를 위하여 비명(碑銘)에 이르기를, 재상 문효공은 진실로 사람들에게 현덕(賢德)을 베푸니 어찌 선조(先祖)를 위하여 효(孝)로써 그 세(世)를 잇지 아니하리요. 소생(所生:자기가 낳은 아들이나 딸)이 박(薄)하여 욕되게 하였으니 목이 메이도다. 반상(泮上:성균관과 문묘의 통칭)에 나아가 남귀(南龜) 영수(潁水:永川)를 멀리 올라 살펴보니 청원(淸源)은 고사(枯死)하고 없으니 누구를 한(恨)하리오, 그 명성(名聲)이 우리에게 떨치어 잠영(潛影)이 밝게 빛나니 후인(後人)이 천춘절(千春節:임금의 탄일을 경축하는 명일)에 용명(龍明) 천편석(阡片石)에 기리노라.
신해년 삼월  외예 취산 신 억 삼가 짓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