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창 하철(河澈) 22세손
설창은 어려서부터 백부 겸재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천성이 총명하여 겸재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17세때 연이어 부모상을 당해 극진한 예로써 장사와 제사를 받들고, 상복을 벗고 말하기를 “부모가 계시지 않는데 무슨 마음으로 과거 공부를 하겠는가. 과거보는 곳은 예의와 양보가 있는 곳이 아니니 군자가 마땅히 들어갈 곳이 못된다”라고 하고는 고향에서 경서 공부에 몰두했다. 설창은 평생 겸재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겸재가 중풍에 걸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설창이 곁에서 시종을 했으며, 손님이 오면 하루종일 모시고 서 있기도 했다.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이 암행어사로 안계에 내려와 겸재에게 예를 묻고 돌아가 왕에게 말하기를 “하모 곁에 모시는 선비 모 또한 예의에 익숙하여 볼만한 점이 많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겸재가 세상을 떠나자 서원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우는 일을 몸소 했으며, 겸재가 남긴 글의 초고가 불에 타 문집을 만들 수 없는 처지였는데도 설창이 사방으로 수습해 마침내 겸재 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설창은 학문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붓을 던지고 무예 익히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조정에 바야흐로 북벌하려는 의론이 일어나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이다”하자 설창이 웃으며 말하기를 “우활한 선비가 어찌 만리의 제후에 봉해지려는 뜻이 있으리오”라고 했다. 벼슬보다는 학문정진에 더 뜻을 둔 설창이었다. 진주 목사나 고을 원의 방문을 받으면 번번이 한 장의 편지로 사례할 뿐 발걸음을 한번도 관아에 들여놓지 않았다. 정승 최석정, 관찰사 민창도 등이 모두 조정에 천거를 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만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수양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높여 말하기를 ‘설창선생’이라고 했다. 설창은 평생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을 마감하니 향년 70세였다. 옥종 덕천강가에 ‘문암(文巖)’이라는 바위가 있다. 큰 바위 두 개가 마주보고 있으므로 문(門)과 같다 하여 ‘문암(門巖)’이라고 하였는데, 주변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문인들이 자주 모여놀게 됨으로써 ‘문문 자’를 ‘글월 문자’로 고친 것이다. 설창이 이곳의 산수를 사랑해 자주 와서 거닐었다. 그리고 바위에 ‘문암’이라는 글자도 새겼다. 마을의 선비들이 설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안계리 송정 길가에 ‘직방재(直方齋)’라는 재실을 건립했다. 그 재실 상량문에 “경과 의를 간직했고 도덕과 문예에 두루 통했네 예절은 옛날 법도를 준수했으니 선비들은 그 기풍을 우르렀네” 라고 해 설창의 학문과 행실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설창은 당대 명필이었다. 그의 문집에 기록돼 있는 필적(筆蹟)에 따르면 “진주풍화루(晉州風化樓) 비봉관(飛鳳館) 진양아문(晉陽衙門), 관덕당(觀德堂), 동장대(東將臺) 서장대(西將臺) 남장대(南將臺) 북장대(北將臺) ”등의 현판 글씨가 모두 설창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덕천서원 정문인 시정문(時靜門) 도 그의 글씨이다. 진양지’ 인물조에 “일찍이 벼슬을 그만두고 성인의 학문에 전심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유림에서 추앙하여 존중히 여겼고, 학문을 연마하는 틈으로는 음양 의약 서예 등에 통달했으며 필획이 웅건하였다. 일대의 금석과 누정의 편액을 써서 원근에 두루하였다. 정승을 지낸 약천 남구만, 명곡 최석정 등이 조정에 천거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들이 귀하게 되어 대사헌에 추증되었다”라고 되어있다. 옛날 진주 관아 건물 현판 글씨 대부분이 설창 글씨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의 학문과 필적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는 당시 진주를 대표하는 선비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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