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재선생(四養齋先生) 하위국(河萎國)선조님 묘 : 전북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온월천


 사양재선생(四養齋先生) 하위국(河萎國)22세손

공의 성은 하씨요, 본관은 진주(晋州)요, 휘는 위국(衛國)이요, 자는 미부(美夫)요, 호는 사양재(四養齋)이니. 조선조 초 명정승 휘 연(演) 시호 문효(文孝) 호 경재(敬齋)이신 어른의 9세손이다. 증조부는 휘 계손(季孫)이요, 조부는 회령포(會寧浦) 만호(萬戶)이었던 휘 영걸(英傑)이요, 황고님은 장사랑(將士郞)이었던 휘 억령(億齡)이다. 선비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참봉 우(遇)의 따님이다. 공은 1564년에 출생하였는데, 성정이 효우스러우며 강직하고 활달하며 큰 절의(節義)를 지니었다. 일찍부터 세마(洗馬) 이효원(李孝元)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모계(茅溪) 문위(文緯)선생을 사사(師事)하여 열심히 배우고 힘써 실천하되, 새벽에서 밤까지 부지런히 닦아서 훌륭한 인격이 일찍 이루어지니, 선생이 심히 애중하였다.같은 고을의 삼암(三岩) 박이겸(朴以謙) 비암(肥岩) 박이항(朴以恒)과 거창(巨昌)의 신식(愼寔). 신안(愼安)과 안의(安義)의 정임과 옥천(沃川)의 최응신(崔應信). 전접과 영동(永同)의 남응홍(南應洪)들과 더불어 도의계(道義契)를 맺고, 서로 제휴(提携)하며 학문과 덕행을 강구 연마(講究練磨)하였다.

임진(壬辰)년에 국내 사정을 살피고 서울로 돌아오니,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함께 환대(歡待)하고 서상(西庠)을 연구소로 지정하여 주었는데, 수 개월 후에 왜란(倭亂)이 일어나서 임금이 피난을 가게 되어 연구소의 문을 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과거볼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당시에 고을의 풍속이 몽매(夢昧)하여 학문의 도를 알지 못하는지라, 공이 사학(私學)을 열어 영재 교육함을 당신의 사명으로 삼으니, 배우러 오는 이가 모여들어 재덕(才德)의 선비가 문하에서 많이 나와서 유교(儒敎)가 왕성히 일어났다. 선대 제향(祭享)을 정성으로 하고, 친족 돈목을 두텁게 하며, 사람 대접을 흔연히 하고, 남의 과실을 들어도 입밖에 내지 않으며,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집안 사당을 배알(拜謁)하는 일을 거르지 아니하고, 물러나 서책을 읽음을 일과로 삼으며, 자제를 법도 있게 가르치셨다.

1630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봉해지고, 1647년에 돌아가시니, 원근의 인사가 애달파하여 덕망 높은 어른이 돌아가셨다며 조문을 지어 가지고 와 곡하는 이가 많았다. 제향(祭享)의 의론이 일어난 끝에 백산사(栢山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온월(溫月)의 유좌(酉坐)에 모셔왔다. 성산 이씨(星山李氏) 사인(士人) 척의 따님과 안동 전씨 공조판서(工曹判書) 일(鎰)의 따님이 전후배(前後配)인데, 이씨는 탄방(炭坊)의 간좌(艮坐)에, 김씨는 공과 쌍분(雙墳)으로 묻히셨다.4남 중 휘 징도(徵道)는 호를 수용이라 하였고, 휘 정도(呈道)는 호를 서악(西岳)이라 하였는데, 문과에 올라 통훈대부로 춘추관기사관 겸 경연사, 옥구현감(沃溝縣監)을 지냈고, 휘 형도(亨道)는 호를 취은(醉隱)이라 하였는데,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휘 현도(顯道)는 호를 모정(茅亭)이라 하였는데 이 사현(四賢)이 모두 도학이 높아서 대덕(大德). 죽계(竹溪). 백산(柏山)서원에 봉향(奉享)되었다.

아! 바람 일 듯 잇따라 나오고 우레와 같이 우렁차게 나오는 공의 논술과, 정련(精鍊)한 금옥같은 학설이 밖으로 세도(世途)를 붙들고 사람의 기강을 세웠으며, 마침내 깊은 산곡(山谷)에서 늙으셨으니, 믿기 어려운 것은 인사(人事)로되 선인을 반드시 돕는 자는 천도(天道)라 할지로다. 내외의 여러 손자들이 百여 인이니, 착함에 반드시 경사가 따름을 이에 가히 증험할 만하도다. 아, 장하신지고 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