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덕망(河德望)23세손
 

하동군 옥종면 위태마을. 얼마 전까지 청암면에 속해 있었는데, 올해 옥종면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생활권이 옥종인데 청암면에 속해 있어 이 마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불편을 겪어 왔다 한다. 마을 앞 ‘범바우등’이라 불리는 곳에 덕망이 뛰어나 여러번 조정에 천거된 선비 양정재(養正齋) 하덕망(河德望)의 묘소가 있다.

제법 가파른 산세 속에 위치한 양정재 묘소 앞엔 ‘증 사헌부지평 양정재선생 진양하공지묘(贈 司憲府持平養正齋先生晋陽河公之墓)’란 묘비에 대산(大山)이상정(李象靖)이 지은 행장이 새겨져 있었다. 대산이 누구인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이현일(李玄逸)·이재(李縡)의 학문을 이어받은 학자이다. 그의 학풍은 아우 이광정(李光靖)과 남한조(南漢朝)를 통하여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졌으며, 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으로까지 계승되었다. 묘비에“상정이 경북에 살아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김낙행(金樂行)을 통해 언행의 대략을 들을수 있어 위안으로 삼았습니다.”라는 구절을 볼 때, 양정재의 학덕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조실록에도 양정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1737년(영조 13년)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도내에 있는 인재들을 천거하기를,“영우(嶺右)에서는 하덕망(河德望)·강성화(姜聖和)가 대신의 천거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안음의 신수이는 학문과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데가 재능도 갖추고 있으며, 금산의 조세붕(曹世鵬)은 명신 조위의 후손으로 효우와 행실이 한 고장의 추중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도내의 명망이 있는 선비들이니, 모두 똑같이 수록(收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뿐만아니다. 경연에서 김재로가 상소하기를 “진주 선비 하덕망, 안동 진사 이광정은 학문이 연원이 있고 행의가 출중하여 조정에서 등용하면 깨끗한 정치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상소를 본 영조가 등용을 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뒤에 다시 양정재의 등용을 주청하자 영조가 이를 받아들여 등용을 명령했지만, 애석하게도 이때 하덕망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찍이 덕망과 학식이 있어 대신들의 천거를 받은 양정재(養正齋) 하덕망. 그는 진주 선비이다. 지금 정확히 말하면 하동군 옥종면 출신 선비이다. 양정재는 1664년 설창 하철과 고령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설창은 남명 후 일인자라 불리는 겸재의 조카로 당대 명필로 이름을 떨친 남명 사숙인이다. 모친은 박신(朴紳)의 따님으로, 박신은 무민당 박인의 동생이다. 무민당은 남명연보, 언행록, 산해사우연원록 편찬을 주도한 합천선비로 역시 남명 사숙인이다. 양종재는 남명학을 가학으로 이어오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남명학을 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가풍을 이은 양정재는 부모를 지극히 봉양해 효자로 이름이 드러났다.

부친이 별세하자 예에 따라 상을 치르고 여막을 지켰는데, 모친에게 문안 드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여막을 떠나지 않았다. 모부인이 위독하자 단지를 해 소생시켰으며, 이로 인해 모부인이 9순까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광영정(光影亭)이라고 이름 하였다. 또 재실을 지어 양정(養正) 이라 이름하고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드러냈다. 인근의 선비 서계 박태무, 묵재 조석규 등과 함께 ‘근사록’등을 강론하였으며, 1731년겨울에는 조부인 겸재 하홍도를 모신 모한재(慕寒齋)에서 경서를 강론하기도 했다. 71세때인 1741년에는 서계 박태무 등과 더불어 ‘남명집’과 ‘산해사우연원록’의 개정을 논의했다.

경상대 이상필교수는 “1700년을 전후해서 진주 지역에서 남명학파를 영도하던 이로는 옥종에 살았던 겸재의 조카 雪窓 河澈(1635-1704)과 養正齋 河德望(1664-1743) 부자 및 知命堂 河世應(1671-1727), 珠潭 金聖運(1673-1730), 忍齋 河潤寬(1677-1754), 西溪 朴泰茂(1677-1756) 등”이라며 양정재의 학덕을 높이 평가했다. 양정재는 1743년 80세를 일기로 광영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지역유림들은 “우리 고장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의지할까”하며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양정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문집도 집안에서 필사본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진양속지’에 그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하덕망의 자는 첨경이요 호는 양정재이니 설창 하철의 아들이다. 문장이 전아하고 필법이 힘차고 굳세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육예에 능하였다. 감사 민응수가 유일로서 임금에게 아뢰었고 어사 박문수가 다시 임금에게 아뢰기를 “독서에는 반드시 의리를 구명하고 부모를 섬기는데는 효성을 지극히 하였습다 라고 했다. 1725년 知事 김재로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진주 선비 하모는 학문과 행의가 영남에서 뛰어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특별이 등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공이 이미 돌아간 되었다. 이어서 지평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