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공(紫西公) 하중호(河仲灝) 23세손

공의 성은 하씨요 휘는 중호(仲灝)이며 자는 긍보(亘甫)이고 호는 자서(紫西)이다. 본관은 진양이며 고려 때 원정공 휘 즙(楫)이 진천부원군(晋川府院君)에, 그 아드님 휘 윤원(允源)은 진산부원군(晋川府院君)에 봉해지고 명신(名臣)이 되셨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경재(敬齋)선생 휘 연(演)이 영의정이 되셨으며 이 분이 공의 11대조이시다. 경재선생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휘 우명(友明)을 낳으시고, 동지사공이 호군 휘 철석(哲石)을 낳으시고, 호군공이 사직 휘 한우(漢佑)를, 사직공이 좌승지 휘 천수(千壽)를, 좌승지공이 세마 휘 혼(渾)을, 세마공이 통덕랑 휘 경량(景量)을, 통덕랑공이 처사 휘 진명(晋明)을 낳으셨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이시다. 증조는 처사 휘 필원(必遠)이요, 조부는 삼재공 휘 세위(世緯)요, 아버님은 은재공 휘 심(深) 부군이요, 어머님은 의춘옥씨(宜春玉氏)이시다.

공은 1777년 12월 15일에 의령 외조리에서 태어났는데 3형제 중 둘째 아드님이시다. 공은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있으며 말소리가 맑고 쾌활하셨다. 일찍부터 가정에서 교훈을 익혔으며 효도와 우애가 깊었으며 맡은 바 일은 엄정하게 계획을 세우고, 가르침을 잘 받으셨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얼마  걸리지 않아 내리 읽게 되고 한(漢)나라 역사에 이르러서는 항우(項羽)가 옳은 일로 타국의 임금을 죽임에 박수를 쳤다. 이에 이르기를 「누구든지 본보기를 지킴에 있어 아버지에게는 신기함을 좋아하도록 꾀할 것이며, 임금에게는 밝지 못한 의리의 뜻을 잘못 말하여서는 안되며 명성을 오래토록 엄하게 빛을 내기 위해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다. 고종(高宗) 말기에는 뜻을 한결같이 하고 집안을 정결하게 한 초가집에서 날마다 편안하게 지내면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스스로 즐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셨다.

청주곽씨(淸州郭氏)와 혼인하여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남은 휘 경(鏡)이요, 차남은 휘 근은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휘 우석(宇碩), 우일(宇一), 우락(宇洛)으로 세 집안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많으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1858년 9월 1일에 돌아가셨으며 장지는 외조리 응봉 현원(應峯玄原)이다. 배위(配位) 청주곽씨는 공의 왼편에 쌍봉으로 묻히셨다.공의 5세손 무호(武鎬), 상호(祥鎬), 한호(漢鎬)가 간직했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비문(墓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는지라 그 성효(誠孝)에 칭찬함이 옳은 일이며, 또, 나와는 더욱 평안한 사이이므로 그리하기로 하였다. 공에 대해서는 문장체제를 나누어 말하기가 어려우므로 간략하게 담아 묶고 이에 명(銘)한다.

보다 따뜻하며 그 거동은 검소하고,

그 덕은 온순함과 떳떳함을 이루었으며,

옳게 집안을 다스림과 본받음이 넉넉함을 영원히 전하여 나갈 것이며,

공을 대접함에 어찌 이 산의 한 조각 비(碑)를 잊을 수 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