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계공(芝溪公) 하선창(河善昌)23세손

공의 휘는 선창(善昌)이요, 자는 민징(玟徵)이요, 호는 지계(芝溪)이다. 남명의 수제자(首弟子) 영무성 선생 휘 응도(應圖)의 현손인데, 1679년에 진주 서쪽 신풍리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수하고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일찍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뜻과 행동이 한결같았다. 장성하여서는 두루 어진 스승을 찾아 배우고 큰 선비들과 교유하여 지조 지킴이 더욱 굳어지고 기량이 매우 커지고 사치함을 싫어하고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않으시니, 사우(師友)들이 모두 걸사(傑士)라 일컬었다.

공의 성품이 효우스러워 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그 뜻에 맞추어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제 때에 하였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을 예절에 지니치게 하였으며, 시묘살이하여 복제(服制)를 마치셨다. 또, 백형(伯兄)과 더불어 우애함이 지극하여 같은 방에서 안락하시니, 향당에서 시례(詩禮)를 지키는 집안이라 일컬었다. 백형이 도적을 토벌한 공로로 원종 이등공신이 되어 부호군을 배수하여 오래 서울에 머물었으므로 공이 가문을 지켰는데, 일찍이 자질(子姪)들을 꾸짖는 소리도 없고 노복(奴僕)들에게 매질함도 없었으나 상하가 화합하였다 공이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두루 명승지를 찾아 다녔는데 만년에 두양(斗陽)에 터를 잡아 사신 것은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신 때문이었다.

드디어 두 갈래 시내가 합쳐지는 물가에 정자를 지어 지계(芝溪)라고 이름하여 풍월을 읊으며 노년을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두양에서 신풍까지는 수십 리의 거리였는데도, 사계절 명절이면 반드시 선영에 성묘하였으니 선대를 받드는 정성을 다하신 것이요, 항상 자질들에게 우애하고 화목할 것을 가르치셨으니 그 가훈의 전할 바를 이룬 것이므로, 이에 그 평생의 독실했던 공부를 볼 수 있을 것이다.1759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를 배수하고 이듬해 8월 15일에 돌아가시어 사시던 곳 뒷산에 장사되셨다. 배위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석규(錫奎)의 따님인데, 묘는 대평의 장방동에 있다. 공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드님 휘 위청(渭淸)이 어머님을 모시고 신풍의 고향으로 돌아와 사신 후 자손들이 이어 살았는데, 1796년에 공의 묘를 배위 박씨의 묘에 이장하여 위장(衛葬)으로 합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