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호군공(副護軍公) 하재량(河再亮)24세손

경주의 서쪽 오십리, 인출산밑 자도기 산지리 산 해좌(亥坐)에는 고 가선대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하공(河公)의 묘소가 있다. 옛날에는 묘갈(墓碣)이 있었으나 중간에 불로 인해 파괴되고 글자가 마몰되어 후손이 개탄하고 비(碑)를 다시 세울 것을 도모하여 봉태(鳳泰)군이 집에 있는 비명(碑銘)을 가지고 무릇 세 번이나 왔다 돌아가거늘, 그 정성스런 효도에 감동되어 90의 늙은이로서 가히 사양치 못하여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재량(再亮)이요 자는 청여(淸如)요 호는 국재(菊齋)며 진양인이다. 대개 그 선조는 계보(系譜)가 전하지 아니하다가 고려 때, 사직공 휘 진(珍)으로 시조로 삼고, 9세손 휘 즙(楫)이 호는 송헌(松軒)이요, 중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천부원군(重大匡輔國崇錄大夫晋川府院君)으로 시호는 원정(元正)이니 중조(中祖)이시다. 3대손에 경재(敬齋) 휘 연(演)이 포은(圃隱)선생에게 수학하고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영의정에 오르고, 시호는 문효로 문종묘(文宗廟)에 배향되니 조선조의 이름난 재상이시며, 빛나는 업적은 다 헤아릴 수 없다.

또 그의 6세손 휘 경현(景賢)이 호는 취암(翠巖)이요 벼슬은 세마(洗馬)이고 진양으로부터 경주로 옮겨 사니 이가 경주 입향조(入鄕椒祖)이시다. 또 손자 남(楠)은 호는 묵계(默溪)이며 벼슬은 찰방(察訪)이고 휘 국립(國立)을 낳으니 호는 회산(晦山)이며, 회산의 아들 성택(成澤)은 호를 경헌(敬軒)이라 하니 공에게는 고조(高祖)와 증조(曾祖)이시다. 고(考)의 휘는 상민(尙敏)이요, 호는 학산(鶴山)이니 성품이 맑고 고상하므로 이렇게 칭하고, 비는 수원백씨 영성(英成)의 따님으로 자식이 없고, 비 평해황씨는 이환(以煥)의 따님으로 공은 1718년 4월 20일에 심곡리 집에서 태어나시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씩씩하고 활달하여 벼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살며 후진(後進) 가르침에 힘쓰니 향당(鄕黨)이 좋게 평하더라. 1782년 3월 22일에 돌아가시고, 1795년 11월 19일에 돌아가시니 묘는 심곡리 두달 새못 남강 건좌(南岡乾坐)이다. 자식이 없어 중형 재관(再寬)의 아들 용만(龍萬)으로 입양하여 중화(重華), 중악(重岳)을 낳으시다. 딸은 윤성린(尹聖麟), 박한중(朴漢中)이다. 명(銘)에 명한다

이름이 드러나신 문효공은 대동의 높은 산이요, 자손 대대로 덕으로 이어 받고,

예로부터 동도는 사대부의 기북이라 일컬었도다. 세마공이 어진 곳 택하니 저 심실이었도다.

대대로 내려오는 세월을 공은 곧 이어받아 행했도다. 효우와 충신을 행하고 관후하며 세밀하였도다.

강호에 마음두고 벼슬은 사양하며, 시서로 생활을 삼고 물과 달 같은 개결한 마음씨 품었도다.

넋은 청산에 부탁하고 돌에 말을 새겨 전하노라.

어지러운 세상 만나 파란도 많았으나,

현명한 자손들 성의 다하여 이 비석 다시 세우나니,

내가 새긴 명문 영원히 남아 천만년을 전하리라!

월성 손제익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