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호군공(副護軍公)하재관(河再寬)24세손

하군(河君) 형태(亨泰)는 순수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나와 사귀어 온 지 사십 년의 오랜 세월이 되었는데 하루는 그 증손 광열(光烈)군으로 임태(壬泰)군이 쓴 행록(行錄)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우리 칠대조(七代祖) 호군공 묘가 서면 산지동 임좌(壬坐)에 자리하여 옛날에는 묘갈(墓碣)이 있었으나 비바람에 깎이고 부스러져 가히 알아보기 힘들어 이번에 새로 비를 새우고자 하나니 원컨대 자네는 좋은 글로 묘도(墓道)를 빛나게 하여 주오 하고 부탁하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꿇어 앉아 말하기를「늙도록 배우지 못하고 재주가 적고 아는 것이 얕아 어찌 능히 땅 속을 드러내며 또 옛 비문이 매몰(埋沒)되어 근거할 바 없어 무엇으로써 아름다운 자취를 묘사할 것인가?」하였다

그 부탁함이 세 번이나 오히려 굳어지니 끝내 그만 둘 수 없어 삼가 행록(行錄)을 살펴 보니 공의 휘는 재관(再寬)이요 자는 화보(和甫)요 성은 하씨이며 관은 진주이다.  시조의 휘는 진(珍)이니 고려 정문(靖文) 양조에 벼슬하여 사직(司直)이었으며 9세 손(八世孫)에 휘 즙(楫)이 있어 고려 충숙조에 문과에 과거하고 공민왕 때 경주 부윤으로 특진하여 찬성사의 벼슬을 하니 호는 송헌이요 시호는 원정이시다.

증손의 휘는 연(演)이니 세종조(世宗朝)에 여러 번 벼슬하여 영상(領相)에 오르고 호는 경재(敬齋)요 시호는 문효(文孝)니 문종묘(文宗廟)에 배향되고 셋째 아들 휘 우명(友明)은 호는 연당(蓮塘)이니 효로서 정려(旌閭)가 내리고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고 또 사대손(四代孫) 휘 혼(渾)은 벼슬이 세마요 다섯째 아들 휘 경현(景賢)은 호가 취암이며 벼슬은 세마 첨중추에 이르고 합천으로부터 경주로 옮겨 자손이 이어지다 고조(高祖)의 휘는 남(楠)이며 호는 묵계(默溪)벼슬은 찰방(察訪)이요 증조(曾祖)의 휘는 성택(成澤)이요 호는 경헌(敬軒)이요 고(考)의 휘는 상민(尙敏)이요 비(비)는 수원백씨 영성(英成)의 딸이나 자식이 없고 비(비) 평해황씨는 이환(以煥)의 딸이니 오남(五男)을 낳아 공은 둘째이시다. 숙종조(肅宗朝) 무자(戊子) 11월 16일에 서면 서곡리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라남에 효우(孝友)에 돈독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먼저 뜻을 살피어 따르고 몸과 뜻을 갗추어 수양하고 형제와 더불어 힘써 나아가며 천륜의 낙을 다하니 마을 사람들 모두의 칭찬이 자자하더라.

나이 60에 특은(特恩)으로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 龍양衛副護軍)을 하고 영조조(英祖朝)경인(庚寅)년에 돌아가시니 63세이시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경주김씨 시태(時兌)의 딸이니 경인(庚寅)년 6월 6일에 돌아가시거늘 공과 같은 날 합장하다. 아들 용대(龍大)는 수(壽)로 가선 벼슬을 하고 다음 용만(龍萬)은 숙부 재량(再亮)의 뒤로 출계하고 사위은 파평인 윤성관(尹聖寬)과 월성인 박세춘(朴世春)이요 용대의 아들은 중의(重義) 중회(重會) 중래(重來)요 용만의 아들은 중화(重華) 중악(重岳)이요 중의의 아들은 문각(汶覺)이요 중회의 아들은 필윤(必潤)과 필원(必源)이요 중래의 아들은 영원(永源)이라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에 원정공의 어진 주손이며 문효공의 훌륭한 후예시다. 

하늘이 주신 벼슬 저절로 나리시와 남은 경사 미치시다,

효도와 우애로 집을 다스리고 내외분 무덤은 동봉이로다,

아름다운 행적 이곳에 모시니 삼가 하여 더럽히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