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전와공(愧全窩公) 하대관(河大觀)24세손
 

 

대관(河大觀) : 자는 관부(寬夫)요, 호는 괴와(愧窩)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증손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행의(行誼)가 순백하게 갖추어졌다. 널리 옛날과 지금에 통했으며 미세하고 오묘한 데까지 연구했다. 웅위한 문사와 강건한 필법으로 일세에 이름을 날렸다. 일찍부터 『속주지(續州誌)』를 찬수했으나 마치지 못했다.

 

괴전와공(愧全窩公) 하대관(河大觀)

곧고도 온화함은 군자의 빛남이요 학실하고 곧음은 군자를 형통하게 함이요, 순하고도 이룸은 군자를 편안하게 함이다』고 한 이 21 자의 말은 상공(相公)허 미수(許眉수)가 일찍이 그 노우(老友) 하겸재(河謙齋) 선생 휘 홍도(弘度)의 묘에 명(銘)한 바 글이니 비록 천 년 뒷일지라도 또 그 사람 되심을 상견(想見)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은 겸옹(謙翁)의 장증손(長曾孫)이신 바 총명하신 데다 학문을 즐기시어 6체(體)의 과거(科擧)문장에 정묘하지 않음이 없어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셨으나 출세를 구하지 않으시고 자취를 전원(田園)에 거두시어 효우를 집안 다스림으로 삼고 덕의(德義)를 법도로 삼고 어조(魚鳥)를 반려(伴侶)로 삼으셨으니 알지 못하괘라 세상의 무슨 즐거움으로 이를 대신할 수 있었으리요? 이는 대개 당시의 당쟁의 화를 징계함이었으니 이름난 석학(碩學)식산 이 만부(息山李萬敷) 제산 김 성탁(齊山金聖鐸)등 제공이 다 공을 경중(敬重)하였다. 만년에 겸옹 연보(謙翁年譜)와 삼조예빙록(三朝예聘錄)을 지으셨고 또 진양속지(晋陽속誌)를 지어 이를 간행하시었다. 공이 숙종 무인(戊寅:1698)년에 나시어 영조 병신(丙申: 1776)년에 돌아가시니 춘추가 79세였다, 진주 서쪽 종화리(宗化里)망말(望末)유좌가 그 묘소이다,

공의 휘는 대관(大觀)이요 자는 관부(寬夫)이니 괴전와(愧全窩)는 그 호이다. 하씨의 본관은 진주인데 고려 사직(司直)휘 진(珍)이 그 시조이시다. 조부님 휘는 영(泳)이요 황고님 휘는 덕장(德長)인데 다 학문과 행실이 있으시었다. 선비님은 선산김씨(善山金氏)인 바 세중(世重)이 그의 아버님이시다. 전배(前配) 조(趙)씨는 파산인(巴山人)봉세(奉世)의 따님이신데 동월후강(桐月 後岡)에 묻히셨고 후배(後配)강(姜)씨는 진주인 시흥(始興)의 따님이신데 공과 합봉되시었다. 아드님은 범성(範聖)이요 사위님은 정 진항(鄭鎭恒) 신 덕감(辛德鑑) 이훈광(李勛光) 문경덕(文景德) 이재승(李再升) 성동익(成東翊)이다 내외 손자 증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종후손 유즙(有楫)이 공의 후손 영두(永斗)와 서로 공과 같은 분에게 묘갈명이 없을 수 없다 하여 나에게 명(銘)을 청하므로 이에 명(銘)한다.

군자의 집에 나서 군자의 풍도를 이으셨도다. 말씀은 반드시 남의 착함을 추켜올리고 악함을 덮으셨으며 행실은 반드시 사(私)를 뒤로 하고 공(公)을 앞세우셨으니 이것이 군자의 덕이요 이것이 군자의 공로이로다. 나무꾼들이여 함부로 묘역(墓域)을 밟지 말라 그 속에 군자가 계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