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참판공(參判公) 하석범(河錫範)25세손

판속(板俗)에 이르기를 「크게 어진 사람은 수를 누리고 수를 하면 벼슬을 내린다」하였으니 현달을 아니 하고도 위의 세가지 존귀한 자격을 갖추어서 벼슬을 한 사람은 바로 고 가선대부 형조참판 진양 하공이시다. 공의 휘는 석범(錫範)이요, 자는 여포(汝浦)인데 고려조 휘 진(珍) 사직공이 시조가 되신다. 11대를 내려와 휘 자종(自宗) 호 목옹(木翁)은 봉익대부 병부상서인데 조선조에 와서 좌의정으로 증직되셨다. 아드님은 군사(郡事) 왕과 풍해도찰사 형(泂)과 문효공 연(演)과 대간공 결(潔)과 증 영의정 부(簿)를 두셨다.

공은 관찰사공의 계출(系出)로 그 13세손이 된다. 휘 계립(繼立), 윤구(潤九), 명달(溟達), 세구(世龜)는 공의 4세 상계(上系)이시다. 어머님은 강양이씨(江陽李氏) 두원(斗元)의 따님이시다. 4남을 두셨는데 공은 셋째 아들이다 1716년에 공을 낳으시니 어릴 때부터 천품이 뛰어나게 영특하시고 큰 포부를 품으셨다. 늘 말하기를 「충효는 백행의 근원이다. 우리 집은 고려 때부터 대대로 충효를 전가해 온 집인데 충효를 배우고자 할진대 선조의 유적(遺蹟)을 봉독하고 지키면 되는 것이요, 다시 선생을 구해서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목옹공께서는 청고하고 성대한 충절로 해동충의록에 올랐으며 관찰사공은 효우하고 공경하는 덕행이 세상에 밝게 빛나고 있으니 매일 그 선조의 끼치신 유훈을 읽고 지키면 되는 것이다. 또 4세 선조께서도 선대의 정신을 잇고 지켜서 한결같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늘 화기애애하게 살아왔음이라」하셨다.

1761년에 어머님 상을 당하여서는 염빈상례(斂殯祥禮)를 가례에 따라 행하였고, 1763년 아버님 상을 당하여서는 백씨(伯氏)가 거년에 먼저 작고하였으므로 승중질(承重姪)인 대원(大源)과 더불어 상례를 극진하게 치루고 몸이 상하도록 애통해 하셨다. 대개 이러한 행실이 돈독한 사람은 임금과 나라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 그러므로 정조대왕께서 그 크로 아름다운 덕행을 들으시고 벼슬할 자격을 갖춘 선비다 칭찬하시고 형조참판의 벼슬을 내리셨다. 1801년 2월 19일에 별세하니 향년 86세이시다. 무주군 복소동 자좌의 언덕에 장사되셨다. 마나님 정부인은 경주김씨 곤의 따님인데 정숙하고 부덕이 있으셨다. 다음 해 정월 19일에 별세하시니 합봉하셨다. 4남을 두셨는데 대수(大洙), 대함, 대은, 대필(大泌)이고 손자와 증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호라! 공이 덕을 닦아 수를 누리고 또 그로인해서 벼슬을 하였으니 그 위에 또 자손이 아름답고 흥성하오니 아마도 선덕을 크게 쌓으신 응보가 아니리요? 공은 옛날 나의 조부님의 외종조부가 되신다. 오늘에 묘비를 세움에 있어서 공의 후손 태익(泰翊)이 나에게 와서 비문을 청하며 말하기를 「금일에 와서 우리 선조의 행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대이다」한다. 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그 유적을 간추려서 옮겨 쓰고 이에 명(銘)한다.

북소동 언덕 위의 커다란 무덤 대부께서 길이 잠드신 봉분이라네.

정성드려 잔 드리고 돌을 세우고 거룩하신 그 행적 새겨 둘렀네.

초목도 흠모하여 향기 드높고 그 위에 뻗힌 서기 양양하여라.

아름다운 한 생애를 담은 이 돌은 백세가 지나가도 더욱 빛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