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공(山齋公) 하재곤(載坤)25세손

行狀
공의 휘는 재곤(載坤)이요, 자는 선징(善徵)이요, 호는 산재(山齋)요, 하씨(河氏)인데 관향은 진주(晋州)다. 고려 사직 휘 진(珍)이 시조(始祖)이신데, 이로부터 대대로 벼슬이 있었다. 조선조에 휘 연(演)이 계시어 호를 경재(敬齋)라 하였는데, 영의정부사 겸 영경연, 예문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를 지내시고,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아 문종묘(文宗廟)에 배향되셨다. 아드님 휘 효명(孝明)은 군자감정 겸 훈련부사, 증이조참판이셨고, 그 아드님 휘 맹식(孟湜)은 자산 군수(玆山郡守)이었으며 아드님 휘 회(澮)는 장사랑이었고, 그 아드님 휘 수겸은 참봉이었는데, 이 분이 공의 9대조가 되신다. 고조님 휘는 창운(昌運)인데, 찰방이었다. 증조님 휘는 천도(天圖)다. 조부님 휘는 한명(漢明) 호는 만포(晩圃) 벼슬은 통정이었는데, 효도로 복호(復戶)받은 사실이 군지(郡誌)에 실려 있다. 아버님 휘 윤구(潤九)는 학문과 행실이 있으셨다. 어머님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예의판서 희적(希迪)의 후손이요, 중태(重泰)의 따님이다.

공은 1728년 16일에 합천 평산(陜川坪山) 자택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특이한 인상이 있었고 총명이 뛰어났다. 8세에 조부님 만포공한테서 글을 배울 때 가르쳐 감독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지런히 공부에 힘쓰고 글씨 또한 해정하게 쓰니, 만포공이 특히 사랑하시어 「우리 집 희망은 이 아이에 달려있다」고 하셨다. 1747년에 만포공이 별세하시니, 궤전(饋奠)을 돕고 손님을 접대하기에 바빠서 책 볼 틈이 없었는지라, 오직 밤에만 공부하여 낮에 하던 공부를 보충하였다. 어버이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이름이 과거장에 떨쳤고, 글을 지으시매 붓을 잡으면 그침이 없었으니 당대 문인. 재사들이 옷깃을 여미고 선배로 추앙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현달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세도를 잊고 사귀기를 원하였다. 참판 황경원(黃景元), 참의 이명선(李命善), 지암 조덕성(趙德成)같은 분들이 예의로써 대우하였다.

신대손(申大孫)이 군수로 와서 먼저 찾았다. 하루는 군수를 맞이하여 황계(黃溪) 폭포에서 노니실새 군수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미 유명한 폭포를 구경하고 또 어진 주인을 만나 사귀게 되니 남쪽에 온 것이 다 행하다」고 하였다. 일찍이 석문 윤선생(尹先生)을 좇아 강문(講問)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선생이 매우 중히 여겼다. 1762년에 문원공(文元公) 역천 송선생(宋先生)을 뵈니 선생이 배운 바를 알아보고 어질다 여겨 더욱 힘써 공부할 것을 권장하였다. 집에 돌아오려 하시매 「산재(山齋)」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 주고 아울러 절구(節句) 한 수를 지어 주면서 깊이 사랑하여 기대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공이 이로부터 내외(內外) 경중(經重)의 분수를 살펴 알아서 영화의 길을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 아늑한 곳을 찾아 재실을 지어 그 재실 이름을 임곡(林谷)이라 하고 날마다 그 곳에 거처하면서 혹은 글을 읽고 혹은 잠잠히 연구에 몰두하시어 날이 저물고 밤이 새는 것을 모르고 지내셨다. 이로 인하여 문견과 학식이 더욱 풍부해지니 문망이 더욱 높아져서 원근에서 따르는 사람이 심히 많아졌다. 그 때, 군수 이병태(李秉泰)가 그 고을에 학문이 부진함을 민망히 여겨서 공으로써 주강(主講)을 삼고 모든 학생으로 하여 금 경서를 논하고 예의를 질문하게 하였는데 이는 남전향약(藍田鄕約)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모방하여 시험함이었다. 이로부터 강양(江陽)의 문학이 빛나고 빛나서 가히 볼 만하게 되었다.이 군수는 본래 청백한 사람이어서 당세에 이름이 높았던 분이라, 그 후에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는데 집이 심히 가난한 중에 상을 당하여 예를 이룰 수 없었는지라, 공이 마침 서울 여행 중 그 소문을 듣고 민망히 여겨 말 안장을 벗겨 부의를 하였다. 그 후 이 군수가 높은 벼슬에 올라 여러 번 편지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끝끝내 가지 않으셨으니, 그 깨끗하게 몸 가짐이 이와 같았다.

1773년 11월 병환에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아시고 아드님들에게 말씀하기를 「늙으신 부친이 계신데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고 문득 이 지경에 이르니 천지간의 한 죄인이다. 너희들은 잘 섬겨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여 나의 죽은 혼을 위로하라」하시고 인해 길 게 탄식하고 별세하시니 12월 2일이었다. 다음달에 평산 용출동(坪山龍出洞) 건좌(乾坐)에 장사할 때 선비와 벗님들의 조문 온 사람들이 여러 군을 비울 정도였다.공의 풍의가 단결(端潔)하고 성품이 인후(仁厚)하여 어려서부터 효성으로 부모님을 섬겨 기쁘게 하고 조심과 순종으로 받들어 어긋남이 없게 하셨다. 어머님 상을 당하여 치상 범절을 한결같이 예법을 따라 하고,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고 웃지도 않으셨으며 기일(忌日)에는 목욕재계하여 제기(祭器)를 씻고 제수 만들기를 몸소 하였는데, 평소 즐겨 잡수시던 음식을 궐하는 일이 없었다. 선대(先代) 제전(祭田)과 석물(石物)을 많이 힘대로 장만하였으며, 자제(子弟)들을 옳은 방향으로 교육하고 여러 4촌 형제들을 친 형제 같이 대접하고, 일가간에는 돈목을 잃지 않고, 남을 사귐에 모나게 하지 않고, 부리는 사람들에게도 은혜와 의리가 함께 이르게 하셨다.

성품 또한 남 돕기를 좋아하여 친척이나 이웃 마을의 혼인. 장례와 배고프고 곤란함을 두루 도와 은혜끼치기를 빠짐이 없게 하였으니, 당세의 학식과 조행이 있는 이를 두루 사귀어 나아가 닦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셨다. 제례 최남두(崔南斗). 은구암 하정익(河廷益). 낙우 오성채(吳聖采). 우수 정내징(鄭來徵). 명와 이창수. 송재 권상경(權尙經)은 막역한 친구들이었다. 배위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문성(文成)의 따님이다. 네 아드님과 한 따님을 두었는데 맡으님 휘는 취심(就深)이요, 다음 아드님 휘 진억(鎭億). 진만(鎭萬). 진천(鎭千)이요, 조당(趙塘)은 그 사위이다.슬프다! 공이 영특하고 발월(發越)한 기품과 자상하고 근면한 자질로 일찍 법도 있는 문하에서 오로지 경전을 익히고 좋은 벗을 사귀어 도움을 받아서 독실하고 부지런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수(壽)를 주셨더라면 그 성취하심이 한량 없음을 것이언만, 중수(中壽)에도 미치지 못하고 별세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하도다.

그 현손(玄孫) 두기(斗基), 5세손 종원(鍾元)이 선대에 빛난 유적이 인멸하여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흩어져 있는 원고 약간을 수습하여 인쇄하려 할새 그 사행(事行) 한 통을 기술하여 그 행장을 나에게 부탁하는 바, 간절히 생각건대 나 상대(相大)는 사람됨이 미약하고 글을 부족하여 진실로 그 소임을 감당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내 뜻대로 되지 못하여 그 가장을 근거로 하여 약간의 수정을 더하여서 오직 훌륭한 군자의 재택(載擇)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