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헌(菊軒) 하달성(河達聖)25세손

진양 하씨가 동국의 이름난 성이 되어 송헌 원정공 휘 즙(楫)과 고헌 진산 부원군 휘 윤원(允源)과 목옹 군부상서 휘 자종의 3세에 이르러 그 휘와 작위 및 사적과 행실이 역사에 실리어 고려의 명신이 되어 있다. 휘 결(潔)께선 조선조에 벼슬하여 대사간(大司諫)이 되시고 공의왕(恭懿王)조에 기미를 보시어 용감히 호남의 정읍(井邑)에 물러나 일생을 마치시었고, 휘 금(襟)께선 명망(名望)으로 뽑히어 참의를 지내셨고, 그 손자님 휘 자청(自淸)께선 함길도 관찰사를 지내셨고, 고조님 낙와 휘 홍달(弘達)께선 좌승지(左承旨)로 증직되시었다. 이분이 겸재(謙齋) 선생 휘 홍도(弘度)의 아우님이시다. 증조님 설창 휘 철(澈)께선 대사헌에 증직되셨고, 조부님 휘 덕원(德元)께선 선전관(宣傳官)을 지내셨고, 아버님 휘 대항(大恒)께선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셨다. 어머님 공인(恭人) 영산 신씨(靈山辛氏)는 경백(景伯)님의 따님이신데, 현효왕(顯孝王) 갑인(甲寅 : 1674)년에 공을 낳으시었다.

공의 휘는 달성(達聖)이요, 자는 청언(淸彦)이다. 어려서부터 강개(慷慨)의 지절(志節)을 지니셨고, 학식이 통달하신데다 큰 국량을 지니시어 그 늠연한 풍도와 위엄을 아무도 범할 수 없었다. 번암(樊庵) 채 정승(蔡政丞) 제공(濟恭)이 공을 한 번 보고 바로 세상에 드문 인걸임을 인정하였다. 겸재 선생께서 당인(黨人)의 무고(誣告)를 입어 종천 서원(宗川書院) 향사 출척의 화를 입으실 때 관찰사 조 엄과 목사(牧使) 조 덕상(趙德常)이 당인을 비뚜루 옹호하여 그 기염이 하늘을 찌를 만하게 두려운 바 있었다. 공께서 심히 통분히 여기시어 단신으로 화망에 걸림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결사적으로 그 원통함을 조정에 외치시어 드디어 신원(伸寃)되어 복향하게 하시니 : 이 때가 정조 무술(武戌)년 5월 18일이었다. 왕이 세 번 전교(傳敎)를 내리어 조 엄 등은 삭직(削職)하여 복죄하게 하고 두목 3인은 매질하여 죽이고 죄가 적은 자는 매질하여 귀양보내고 나머지 무리는 다 물리쳐 버리니, 이에 선생의 도가 다시 세상에 밝혀졌다.

아, 공의 이력의 빛남이여! 살피옵건대, 공께서 상경하여 신원을 고하실 때에 사림(士林)이 당인(黨人)의 세력과 기염을 두려워하며 숱해 몸을 사리고 입을 다물었으되, 오직 진양 강공(晋陽姜公) 필준(必儁)과 태안 박공(泰安朴公) 선상이 힘을 다하여 구조(救助)하였던 것이다. 공께서 20년간 경향으로 왕래하심에 재화(財貨)를 소비함이 누거만(屢巨萬)에 이르렀으되, 재물 때문으로 저지되지 아니한 것은 강공과 박공의 힘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해주 정공(海州鄭公) 순신(舜臣)과 밀양 손공(密陽孫公) 여흠(汝欽)과 연안 이공(延安李公) 지흥(之興) 또한 혈성으로 정도(正道)를 호위(護衛)하였으므로, 매사에 이분들에게 자문하시었다. 또, 살피옵건대, 공께서 종을 두시었는데, 그 종이 지극한 충성으로 주인을 섬겼던 것이다. 그리고, 자못 큰 지모(智謀)와 담력을 지녀 용하게 꾀를 써서 당인(黨人)의 문권(文券)를 빼앗아 왔으므로, 훗일 공께서 법정(法廷)에 나가셨을 때 그것이 큰 도움이 된 일이 있었다. 공께서 어느 제 서울로 바삐 가실 때 종이 말을 끌고 모시어 갔었다. 바야흐로 급히 나루를 건너려는데, 배가 중류(中流)에 있었다. 마침 이 때 병사(兵使)의 행차가 서울로부터 시골로 내려가던 참이라, 배를 자기 쪽으로 가도록 부르거늘 공이 종이 벼락 같은 소리로 호령하였으므로, 도디어 배가 이 쪽으로 돌아 공께서 먼저 배를 타고 건너시게 되었다. 병사가 공을 뵙고 교제하기를 청하여 좌우를 돌아보아 이르되, 「이런 분은 내 평생에 처음 뵙는 인물이시라」하고 놀란 소리로 감탄하여 말하되, 「이런 주인이 계시니, 이런 종이 있게 되었도다」하였다.

공께서 일찍이 국헌(菊軒)이라 자호(自號)하셨거니와 시문(詩文) 약간 권을 남기셨으나 병화로 다 없어진 중 다만 몇 조각의 잔편이 원변록(院變錄)속에 실리어 있을 뿐이다. 또, 세필(細筆)로 쓰신 두 책의 묵적(墨蹟)이 있는데, 이는 지금까지 잘 보장(寶藏)되어 있다. 신해(辛亥)년 정월 12일에 돌아가시니 : 수가 58이었다. 안식동 의약봉 유좌(安息洞醫藥峰酉坐)에 묻히시었다. 장사 지낼 때 만사(挽詞)가 심히 많았으나 또한 불에 타 버리고 오직 「머리털은 서강(西江)의 풍랑 속에 세고, 이름은 동국의 사림(士林) 중에 빛나느리라,」고 한 구만이 향리 선비의 입에 전송(傳誦)되나니 : 대개 이는 그 신원 복향(伸寃復享)의 일을 가리킴이다. 마나님 두 분이 계셨으니 : 한 분은 함양 박씨 태순의 따님이시요, 한 분은 진주 정씨 하신의 따님이시다. 후사가 없기로 아우님의 아드님 휘 석봉(錫鳳)으로 양자를 삼으셨다.

옛날 황명(皇明)세대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전공(錢公)이란 분이 있어 맹자(孟子)를 위하여 가슴을 열고 화살을 맞아 죽으니, 천고에 다 의롭다 여기었고 후인이 그 늠연함이 머리털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논자(論者)중에 혹 다음과 같이 일컫는 이가 있다 : 전 상서(錢尙書) 아니더면 맹 부자(孟夫子)가 없었을 뻔하였다고. 이 말이 지나친 말이 될 두려움이 있으되, 맹자를 위하여 죽고자 한 이론 오직 전공 한 사람이 있었을 뿐임은 분명한 일이다. 우선(禹善 : 필자)이 간절히, 국헌공이 아니시더면 겸재(謙齋) 선생 유덕(遺德)이 없어질 뻔하였다고 참론(僭論)하거니와, 이 말이 또한 지나친 말이 될 두려움이 있으되, 겸재 선생을 위하여 죽고자 한 분으로 오직 국헌공이 계실 뿐이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아, 우리 나라 당쟁의 화를 어찌 차마 이르리요 어찌 차마 이르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