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참판공(兵曹參判公) 하치해(致海)27세손

주역에 이르기를 선(善)을 많이 쌓아 온 가문(家門)에는 반드시 경사(慶事)가 넘치고 그러하지 못한 집안에는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만약 그 적선(積善)을 살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면 악(惡)으로서 사람들을 가히 알 수 있다 하겠는가. 나는 일찍이 낭주(郎州)에서 하씨(河氏)의 번연(蕃衍)함과 준수한 인물을 많이 보았으며 전세(煎世)에 종덕(種德:은덕이 될 일을 행함)에 있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바로 조상(祖上)의 음덕(蔭德)에 보답(報答)함을 뜻함이니, 하루는 허씨(許氏) 선비 헌배(憲培)께서 다행히 나에게 오시어 그의 중세조(中世祖) 병참공 천각(阡刻)의 문(文)을 징험(徵驗)할새 행장(行狀)을 위하여 그 족인(族人)의 정확한 근원지를 출시(出示)하여 그것을 시독(試讀)하니 나는 비로소 공(公)을 뜻하는 바를 깨달았도다.

공의 휘는 치해(致海)요 자는 식언(式彦)이고 하씨이니 진주인이라. 상계(上系)는 이른 바 지재공(志齋公) 묘문이 상세하므로 이를 약술하노라. 휘 지재(志齋)는 해남(海南)에서 오시어 비로소 영암(靈岩)에 거(居)하시니 공에게는 7세조 되시니라. 고조의 휘는 정결(廷訣)이오 증조의 휘는 응두(應斗)요 조의 휘는 일청(一淸)이라. 고(考)의 휘는 상천(象天)이요 비는 김해김씨이며 휘 경천(經天)과 김해김씨는 공을 생(生)하신 고비라. 공은 어릴 때부터 도량이 남과 달라 보는 자마다 하문(河門)을 번창시킬 자는 반드시 이 아이라 하며 다 칭송하더라. 장성하여 의지와 기개가 호탕하고 영매하여 세상의 변화에 따르지 아니하고 일찍이 큰 재물이 있어 의리(義理)를 좋아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학궁(學宮)을 창도(唱導)하고 종족(宗族)의 향당(鄕黨)을 권장(勸奬)하니라. 어는 해 남도(南道)에 대기근이 있어 공이 곳간을 열어 빈궁한 자들을 살리시니 비록 유민(流民)이나 걸인들도 공을 보면 자부(慈父) 또는 활불(活佛)이라 하더라. 이러한 조상(祖上)의 음덕(蔭德)으로 증손 휘 호귀(浩貴)가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병조참판에 이르니라.

공은 1735년에 출생하여 1793년 5월 3일에 졸(卒)하시니 묘는 전남 영암군 도포면 목정동 안산부 간지원(案山負 艮之原)이요 배(配) 김해김씨는 공묘(公墓)에 합봉하고 계배(繼配) 양주아씨(楊州阿氏)의 묘는 덕진교(德津橋) 녹유원이라. 세 아드님을 두었으니 장남 월록(月祿), 차남 영록(永祿)은 김씨(金氏) 소생이고 삼남 긍록(亘祿)은 아씨(阿氏) 소생이라. 석봉(錫鳳), 동봉(銅鳳), 종봉(鍾鳳), 부봉은 장남 월록의 손(孫)이고, 철관(哲觀), 용관(龍觀), 호관(虎觀), 능관(能觀), 준관, 남관(南觀), 만관(萬觀)은 차남 영록의 손(孫)이며, 수관(守觀), 백관(百觀)은 삼남 긍록의 손(孫)이다. 증현손(曾玄孫)은 번거로워 다 기록치 못하노라. 이어서 명(銘)하니,

베풀려해도 덕(德)이 없고 빌려 쓰려고 해도 서(書)가 없으니

공이 사성(司成)의 자손은 풍(風)과 같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니라.

저 창생(蒼生)이 망망하다 하여 보답함을 알지 못한다 아니하니

운감(雲監)을 청하여 보고 이로 인하여 그 녹봉을 받음이 무궁함을 보고 싶어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