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좌승지공 하한종(河漢宗)28세손

공의 휘는 한종(漢宗)이요, 자는 낙서(洛瑞)요, 호는 노송(老松)이라, 성은 하씨(河氏)로 진양을 관향으로 하고 고려인이다. 대대로 벼슬이 혁혁하고 해동의 이름난 문벌이었으며, 조선조에 와서 휘 연(演)은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이시며 세자사(世子師)로 시호가 문효(文孝)이시고, 호는 경재(敬齋)이시다. 아들 휘 우명(友明) 동지중추부사 호 연당(蓮塘)을 낳으시고, 연당은 휘 철석(哲石) 어모장군 호 학암(鶴巖)을 낳으시고, 학암은 휘 한우(漢佑) 충위교위 충무위사 호 매계(梅溪)를 낳으시고, 매계는 휘 천수(千壽) 증 승정원 좌승지 호 성재(惺齋)를 낳으시고, 성재는 휘 혼(渾) 증 승정원 좌승지 호 모헌(募軒)을 낳으시고, 모헌은 휘 경현(景賢) 세마 호 취암을 낳으시니, 그 나머지는 사람의 중망으로 모두가 음덕하여 벼슬하지 아니하다.

고조(高祖)의 휘는 재량(再亮)으로 가선대부 행 절충장군, 호는 국재(菊齋)요, 증조(曾祖)의 휘는 용만(龍萬)이니 문학으로서 당세에 명망이 있고 호는 추모당(追募堂)이요, 조(祖)의 휘는 중화(中華)요, 우애돈독하여 원근에서 크게 칭송을 받고 호를 은암(隱巖)이라 하다. 고(考)의 휘는 달원(達源)이요, 본성이 효우(孝友)하고 문무를 겸하여 행 오위장을 하시고, 비는 경산전씨로 부덕이 있으시고, 공은 순조(純祖) 갑술년에 향리 사제에서 태어나니, 날 때부터 기질이 남다르고 자라남에 전중 온아하고, 수신제가의 절도에 어른들의 가르침을 조금도 어기고 넘어서지 아니하고, 그 외 글쓰는 일이 비록 청망(淸望)이 있게 보이나 보통인 것 같으면서도 늠름하게 장자의 기풍이 있으니 가히 일러 한 시대의 백성의 법이 될 것이다. 십실(작은 고을)의 장부로 부러워 할 것인가? 75세로 천수를 다하니 묘는 영천 북안면 덕림산 중턱 유좌(酉坐)이고, 배위는 하양허씨 훤(暄)의 따님이요, 문경공 허주의 후(后)로 일찍 별세하여 묘는 심곡 불당곡 산 묘좌(卯坐)이고, 아들에 우준(遇駿), 갑청(甲淸), 철규(哲圭)이요, 우준의 아들에 석주(錫周)요, 석주의 아들에 범태(凡泰), 성태(城泰), 정태(定泰)요, 범태의 아들에 상각(相珏), 상우(相瑀)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음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만약 성명 시대의 관직에 있었더라면 서민들에게 자그마한 은택이라도 펼 수 있었을 터인데, 다만 삼품(三品)의 은혜를 입는데 그쳤으니 끝내 태사씨(太史氏)의 슬픔이 공에 있음을 면치 못하고, 비록 탓하고 원망하지 아니하나 보배를 감추어 두고 팔지 아니함과 같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 하리요? 하루는 공의 증손 봉태(鳳泰)와의 친숙한 정의(情誼)로 해서 조카인 상인(相寅)이 찾아와 간곡하게 비문을 청하기에 본디 글을 잘하지 못하나 감히 이 일의 역할을 사양치 못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하노라. 명(銘)에,

저 심실을 바라보니 훌륭한 분의 유택 있도다.

나의 근본 행실 닦고 나의 산천 사랑하였도다.

선대의 교훈 잘 이어 처음 먹은 마음 잃지 않았도다.

자손을 가르침에 조석으로 게으르지 않았구나.

자못 글 읽고 아담하여 명망은 사림에 두터웠도다.

오직 근본만 힘쓰니 속된 인연 침범치 않았도다.

이 명문 돌에 새겨 후손 들에게 남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