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절제사(僉節制使)하용제(河龍濟)28세손

우리태왕(太王)이 왕위(王位)에 있을 때 군신(君臣)의 조회를 받고 문무백관에게 물으니, 무신(武臣) 중에 하공이 있어 병법(兵法)에 깊이 통달(通達)하셨기로, 대원군(大院君)이 임금에게 천거하여 석주군 방어사(石州軍防禦使)가 되어 서문(西門)을 굳게 잠가 음우(陰雨)를 방비하고 조금 후에 조정에 돌아와 가선대부에 오르셨다. 연로함에 이르러 집에 계심에 가정 행실이 심히 아름다워 조정 사대부로부터 항간 여론에 이르기까지 이는 무인의 유가(濡家)라 하였다. 공의 아드님 용제(龍濟)의 자는 은거(殷巨)인데, 사람됨이 자상하고 검약하여 호를 약헌(約軒)이라 하였다. 그 지난 자취는 무인(武人)이지만 그 마음과 행실을 살펴보면 유자(儒者)이다.

1854년 6월 27일에 출생하여 나이 17세에 아버님의 명으로 곽징군(郭徵君) 명원선생(鳴遠先生)에게서 사서(四書) 및 좌씨전(左氏傳)을 배우실새 마음이 기꺼워 성심으로 복조하여 제자의 직분을 다하였거니와 일찍 실천역행으로 성취하여 유가의 모범을 얻은 것이 다 징군의 히이었다. 1872년에 호방(虎榜)에 오른 것은 부모님을 위하여 당신 뜻을 굽힌 것이요, 당신이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1880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애통하여 거의 돌아가실 뻔 하였을 때 징군이 수필(手筆)로 예서일부(禮書一部)를 써주니, 한결같이 그 명령을 좇아 행하는 바를 예에 맞게 하였다. 상(喪)을 마친 뒤 징군을 따라 풍악을 유람할새 내외금강을 두루 보고 시(詩)로써 그 지난 바를 묘사하니, 그것이 수백 편이었다.

1884년에 의정부 공사관을 배수하였고, 1887년에 수문장에 제수받은 뒤 훈련원 주무 판관 첨정에 승진하였으며, 1888년에 선전관 총어령 초관(哨官)을 배수하였고, 1889년에 또 의정부 공사관을 배수하였으며, 1892년에 대흥(大興)군수를 배수하고 삼척진 영장(三陟鎭營將)으로 전근하셨다. 삼척진의 백성들은 고기잡이가 직업이었는데, 이전에는 가혹한 행정으로 이익은 관에 돌아가니 관리들이 간악해져 백성들이 곤경에 빠져 살 수 없었더니, 공이 부임하여서 그 폐단을 혁신하되 관속(官屬)들의 잡비를 돌려 백성들을 각기 영업하게 하시니, 백성들이 비를 세워 사모하였다. 만기가 되어 격포진 첨사(格浦鎭僉使)로 전보되셨는데, 부임 후 몇 달이 되지 않아 변경(邊境)이 무사하게 되었다.

1893년에 관직이 해임되어 돌아가 개연히 탄식하며 이르기를 「국사가 날로 그릇되어 가니 다시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고, 부모님 춘추가 이미 높아 섬길 날이 짧으니 이로부터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다」하시고, 오로지 부모 섬김에 뜻을 두고 더욱 학문에 힘쓰며 스스로 근칙하기를 생각하고 그 밖의 일체는 생각하지 않으셨다. 1894년 갑오동란에 국중이 소란해짐을 틈타 공의 집에 죄를 지은 자들이 때를 노려 당을 모아 공의 집을 불사르고 약탈하니, 공이 노친을 받들고 어린 아이를 이끌어 험한 골짜기로 피난하여 갖은 고생을 다 겪었으나, 부모님 봉양에 힘을 다하여 주무시는 곳을 편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을 공양함에 조금도 빠짐이 없게 하셨다.

1901년 가을에 징군을 따라서 금산(錦山)을 유람하여 남해의 좋은 경치를 다 보았다. 1904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그 때 춘추가 고령이었는데도 피눈물로 3년을 지내니 조상하는 이들을 기꺼워하게 하셨다. 1905년에는 을사 5조약이 이루어져 나라가 망하니, 망국 대부는 확포지사에 스스로 물러서야 한다 하시고 염관소복으로 머리에 비실 아니하고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하여 세상에 숨어 일생을 마치기로 작정하셨다. 1918년에 상황(上皇)이 서거하니 설위(設位)하고 통곡하여 3년복을 입으시며 이르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임금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부모없고 임금없이 어찌 살겠는고?」하셨다. 그 때 선비라 하는 자가 있어 복(服)을 못 입는다는 의론을 일으켜 원수의 복을 어찌 입겠는가라고 말하거늘 공이 듣고 말씀하기를 「내 일찍이 말하기를 글은 가히 읽어야 하나 종종 간사한 말과 비뚤어진 행동이 소위 글 읽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하니 이를 듣던 사람들이 지나친 말이라 의심하였는데, 지금 금수만도 못한 자가 과연 다른 사람이 아님을 알 게 되었다.

천하 만고에 어찌 임금없는 백성이 있으리요? 이 임금을 우리 임금이 아니라 하여 복을 입지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 임금이 별도로 있어 장차 그 임금의 복을 입을 것이니 이 같은 자는 우리 무리가 아니라」하셨다.1919년 봄에 팔도 인민이 국장에 크게 모였는 바,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있어 나라를 회복할 기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독립기를 세우고 만세를 크게 부르니 하루 사이에 전국이 같이 응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파리에 글을 보내어 대의(大義)를 천하에 밝히니 이로 인하여 일옥(日獄)에 갇힌 사람이 수만 명이 되었다.

공은 진주 감옥에 갇히어서 바르고 곧게 항의하여 조금도 굴(屈)하지 않았다. 옥중에서 칠언시(七言詩)를 지었는데 「비 내리고 바람 불어 밤이 다 가도록 눈앞에 한국을 찾아볼 데 없구나」하셨고, 또 「하느님이 화(禍)를 돌이키게 할 때 언제일런고? 나라 앞날이 아득하여 옛 신하가 통곡한다」고 하셨고, 또 「가소롭다. 당년에 토포사(討捕使)였던 이가 어찌하여 나쁜 죄인과 함께 앉았는고?」하셨으니, 그 말이 다 충의심(忠義心)의 느낀 바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읽어서 세 번 탄식하게 하였다. 귀관(鬼關:저승문)에서 벗어난 뒤 고상한 모습과 마음의 기운이 평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학문의 힘이라 하였다. 불행히 이 해 1919년 11월 8일에 병환으로 별세하시니, 향년이 66세였다. 익월 경인일에 진주 서쪽 자매산(紫梅山) 곤좌에 장사되셨다.

그 선조는 진양인이니, 시조 휘 진(珍)으로부터 사직(司直) 휘 보(保)와 증 자금어대 직의와 중대광 진천부원군 즙(楫) 호 송헌(松軒)과 대광 진산부원군 윤원(允源) 호 고헌(苦軒)과 전 병판서 자종(自宗) 호 목옹(木翁)에 이르기까지 다 고려의 명공거경(明公巨卿)이셨다. 조선의 대사간 결(潔)로부터도 대대로 벼슬이 빛났고, 집의 진 호 태계(台溪)에 이르러는 문장과 풍절이 세상의 추앙하는 바 되었는데, 공은 이 분의 10대손이다. 증조님 시명(始明)은 영장(營將)이요, 조부님 한조(漢祖)는 무과요, 선비 정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병두(炳斗)의 따님이요,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여주 이씨(驪州李氏) 종하(鍾夏)의 따님이다. 두 아드님은 홍규(弘逵). 상규(祥逵)인데, 상규는 출계하였다. 사위는 조현용(趙顯瑢)이다.

아! 몸은 비록 말위지적에 계셨으나 문학에 토탄지기가 있고 또 일시 명석(名碩)과 교우강마하여 문자의 묘(妙)를 얻은 바 있어, 그 글이 전아(典雅)하여 가히 읽음직함이 많았으며, 또 필법(筆法)이 장하여 대왕(大王)이하 각 가법첩(家法帖)의 구격삼체(九格三體)를 탈진(脫眞)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그 정(正)을 농운의 유묵(遺墨)에서 얻어 십옹(十甕)이 집이 되고 철엽(鐵葉)이 문이 되어 성명이 세상을 기울였으니, 구하는 자가 장꾼 같아서 날마다 여가가 없으셨다. 무릇 이름난 누각, 큰 정자 등의 액자와 금석 종정에의 명(銘)에 공의 손이 안 간 데가 없어, 당세에 글 쓰던 선비들이 다 방교독보(放敎獨步)라 하였으니, 이는 그 문장과 글씨가 출등한 때문이었다.

아들 홍규가 나를 부친 친구인 연로자라 하여 그 유문(遺文)을 받들고 와서 또 행장문 쓰기를 청하는 바, 내가 이 사람을 주문(洲門) 장사(葬事)에서 처음 보아 예의지석(禮儀之席)에 종사하였더니, 지금 생각함에 의연 어제와 같다. 오고 가던 서신에서 매양 서로 잊지 말자 하였거니와, 나와 그대가 다 늙어 백수가 되었고, 세상이 크게 변했으며 동지 제공이 차차 떨어지는데, 이제 또 행장문을 짓게 되니, 인간 세상을 회고함에 슬프지 아니하랴? 삼가 그 글을 수정하고 그 것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썼다. 조그마한 행동 중에서도 기술할 만한 것이 있으나 모언으로 다하지 못한 것은 후인들이 이 장(狀)을 살펴보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