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봉서공(義士鳳棲公) 하종호(河宗浩)29세손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몸에 재기(才器)를 감추었다가 때가 오면 움직인다」하니 이는 모름지기 선비가 가진 포부를 반드시 세상에 수용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만나는 시기가 평화로운 때도 있고 어지러운 때도 있어 앉아서만 기다릴 수 없으므로 옛날 진나라 두원개(杜元凱)는 몸을 일으켜 오(吳)나라를 정벌하고, 촉(蜀)나라 서서는 양양에서 봉을 노래하니 공업(功業)을 이루고 못이루는 것은 오직 그 사람에 있는 것이지 그 때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 의병통수(義兵統首) 진양하공(晋陽河公) 역시 그와 같은 분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는 종호(宗浩)요 자는 성중(聖仲)이요 호는 봉서(鳳棲)이니 고려 사직 휘 진(珍)이 시조이다.
윤원(允源)은 대사헌으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휘 자종(自宗)은 봉익대부 병부상서로 조선조에 들어와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휘 형(泂)은 관찰사를 지내니 영의정 문효공(文孝公) 휘 연(演)의 중형이다. 다시 사대를 전하여 휘 순(淳)은 생원이요, 휘 숭해(崇海)는 진사요, 휘 연(淵)은 첨지중추부사요, 휘 응상(應湘)은 현감이니 이상이 공의 10세 상계이다. 고조의 휘는 석범(錫範)이니 수(壽) 가선대부 형조참판이요, 증조의 휘는 대은이요, 조의 휘는 한두(漢斗)요, 아버님은 휘는 경룡(景龍)이니 유림에 명망이 있었다. 어머님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사모(思模)의 따님이다. 공의 생가 부친의 휘는 치룡(致龍)이요, 모친은 선산김씨(善山金氏) 경묵(景默)의 녀이다.

1837년 11월 8일 거창봉계리(居昌鳳溪里)에서 태어났는데 천부의 기질이 우뚝하니 봉이 서세(瑞世)에 나타난 것 같았다. 종숙부 경룡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어려서부터 이미 성효의 도리를 알아 양친의 명에 순종하였으며 일찍 생가 부친상을 당하여는 모든 집상의 예를 갖추었다. 복을 마치고 독서에 열중하여 경서. 사서를 열람하고 도략(圖略), 감여(堪與: 風水)에까지 정통하였으나 세상에 이름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제갈량(諸葛亮)이 임천에서 늙듯, 심법(心法)을 지키어 어버이 섬기는 도리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물에 미치어 화락하고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니 가정을 다스림과 군왕에의 진헌이 어찌 다스리는 자의 할 바가 아니리요? 백씨가 일찍 돌아가니 그 다하지 못한 형제의 정을 통감하여 그 아들을 길러서 성취시키고 계(契)를 만들고 학당을 설치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니 남전유모와 같음이 있는지라 여기에서도 공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다.

갑오 동학란에는 부사의 추천으로 통수(統首)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공은 세 아들을 거느리고 도마현(都磨峴)에 나아가 적을 방어하니 적이 감히 영호(嶺湖)의 경계를 넘지 못하여 영남지방을 침범하지 못하고 모든 고을이 안도하게 되었다. 다만 유사(有司)가 포상의 절차를 거행하지 못한 나머지 조정에까지 미치지 못하니 이것이 한심한 일이요, 또한 한이 된다. 오직 부민들이 그 유덕을 기리어 비를 세우니 그 비문에 이르기를 「영호남 경계의 모두가 귀화하여 사람마다 덕을 칭송하고 마을마다 비를 세웠다」하니 거창읍지와 경남도지에 실려있다. 공은 이에 개의치 아니하고 1873년에 남유(南遊)를 기록하고 1896년에는 금강산을 여행하니 이는 공이 소요 풍영하던 자취요, 충정공 민영환, 참판 정관섭(丁觀燮), 승지 한시동(韓始東), 승지 이건용(李建容), 부사 정대무(丁大懋) 등은 모두 막역한 사이었다.

1898년에 서울에 들어갔다가 광주두능(廣州斗陵) 정참판댁에서 돌아가시니 이 집은 바로 손서의 집이다. 향년 62세요, 이 날은 4월 14일이다. 모전양곡간좌(茅田陽谷艮坐)에 장례하였다. 배(配)는 하빈이씨(河濱李氏) 정섭(正燮)의 따님이다. 삼남삼녀를 두셨는데 아들은 태홍(泰洪), 태성(泰成), 태원(泰源)이요, 사위는 남원 양성용(梁聖容), 거창신종우(愼宗佑), 연안 이한성(李翰性)이다. 태홍의 아들은 진식(晋植), 명식(明植)이요, 태성의 아들은 천식(千植), 정식이요, 태원의 아들은 용식(鎔植)이다. 진식의 아들은 병길(炳吉), 병헌(炳憲), 병용(炳容)이요, 명식의 아들은 영필(榮弼), 영백(榮百), 영수(榮守)요, 천석의 아들은 병두(炳斗), 병대(炳大)요, 정식은 아들은 동근(東根)이요, 용식의 아들은 병석(炳碩), 병관(炳灌)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필이 나의 벗 황재현(黃在炫)의 소개로 나에게 묘도문을 청하니 내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나 조상을 잘 계술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드디어 장문을 살피어 명(銘)한다.

봉계에서 정기를 기르고 마현에서 공을 세웠다.

진석(晋石)이 말이 없으매 한(漢)의 도형(圖形)을 어찌하리.

고요한 묘소에는 흰 버들만 둘러있다.

아! 여기가 봉서 하공의 무덤이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