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공(新圃公) 하균용(河均容)29세손

세상의 도리가 흐려지고 인심이 흉흉하여 조상을 모시는 일을 알지 못하고 온 세상 모두가 저 잘났다는 말만 거침없이 잘하는구나. 이런고로 강좌칠현(江左七賢) 및 유도(儒道)의 사림(士林)이 분개하고 원통하게 여기니 구슬픈 심정이 드는도다. 이에 서로 모여 하나의 모임을 만드니 동인연수회(同人硏修會)라 이르고, 창녕군 신구리에 사는 하균용(河均容)은 초휘(初諱)가 진구(鎭鳩)요 자는 인숙(仁淑)이고 호는 신포(新圃)니 역시 그 모임의 일인이라. 몸은 강건하고 의지는 굳으며 강직하고 그를 보면 그의 행실을 가히 알 수 있으니 시퍼런 칼날을 밟고 지나갈 만큼 용기가 있으시다.

이런고로 사람들은 감히 그의 행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며, 할 수 없는 것에 이르면 회우(會友)들 모두가 앞장서서 도와주었다. 가문에서 효우충신(孝友忠信)의 행적에 지극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에도 믿음직하여 다른 사람들에도 믿음직하여 남을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학문에는 힘써 넓히지 않았으니 지혜로워 정확하지 않음이 없었다. 뜻은 많이 펴지 못했으나 말을 하면 곧 마을 사림(士林)의 중심이 되니 유도회장(儒道會長) 향교(鄕校) 등의 직책을 맡았다. 이러한 직책은 사림(士林)의 추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사원(祠院)의 모든 임무에 이르기까지 공헌한 바가 컸다. 명성이 뜻하지 아니하게 자자하게 들리니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병이 들어 신음한 지 수 개월, 사속(嗣續)이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임종하셨다. 신미년 2월 12일에 집에서 졸(卒)하시니 태어나신 것은 계축년 11월 26일이니 79세 이시었다. 신구리(新龜里) 이현 가운데 봉우리 아래 작은 둔덕에 장사하니 곡하며 보내는 자 수 천이고 정려(旌閭)를 새로 세우니 처사(處士)의 인품과 행적이 다른 사람보다 소중함을 추측하여 알 수 있겠도다.

그분의 상계(上系)를 상고해 보면 진양하씨로 고려조에 중훈대부(中訓大夫)를 지내신 사직공(司直公) 휘 진(珍)이 시조이시며, 그 후로 대광보국 숭록대부를 지내신 진천부원군 시호 원정(元正) 호 송헌(松軒) 휘 즙(楫)이 관조(貫祖)되시며, 영의정을 지내신 문효공(文孝公) 경재선생(敬齋先生) 휘 연(演)이 중세조(中世祖)이시다. 뛰어난 선조가 수 분 전하며 낙은공(洛隱公) 휘 극성(極成)은 부사과(副司果)로 세상의 물정이 잘못됨을 보시고 나에게 옷을 벗어 주시고 남쪽으로 물러가시어 영산(靈山) 서쪽 성지산(聖智山) 아래 즉 지금의 신구리에 전거(奠居)하시고 재실(齋室)과 편액을 세우셨다. 하루는 새로 시(詩)를 읊기를 「천부적으로 타고 난 백성의 성품은 바르고 조화로운데, 혹 물욕에 얽매인다면 다시는 사람의 됨됨이를 새롭게 바로 잡을 수 없으며 도(道)는 성심(誠心)과 경애(敬愛)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용기있게 나아간다면 성역인(聖域人)으로 10대손사이에 어찌 어려움이 있으랴」라고 하셨다.

통정대부를 지내신 호 은계(隱溪) 휘 응청(應淸)은 재터를 닦고 먼저 그 사당을 우신재(又新齋)라 훌륭하게 이름짓고, 경서(經書)와 문집을 갖추어 쌓아놓고 형 응태(應泰)와 함께 학문을 연마하니 그 학업이 빛났다. 세상사람들이 칭송하는 쌍효(雙孝)는 5대조되시며, 증조는 성암공(性庵公) 휘 영권(永權)이시고 조는 휘 대효(大孝)이시며 고(考)는 휘 남규(南奎)이시다. 영산(靈山) 신재영(辛在榮)이 외조부(外祖父)되시고 서흥김씨(瑞興金氏) 희출(熙出)은 장인이시다. 삼남삼녀를 기르시니 아드님은 재철(在澈), 재석(在錫), 재목(在穆)이요 사위는 순흥 안기준(安基濬), 창녕 성린(成麟), 곡부 공의열(孔義烈)이다. 재철의 아들은 형종(炯鍾), 호종(皓鍾)이요 사위는 경주 이재철(李在哲), 벽진 이성철(李聖哲)이고, 재석의 아들은 영종(泳鍾), 홍종(泓鍾)이요 사위는 해주 오창운(吳昌雲)이고, 재목의 아들은 원종(元鍾)이다. 안기준의 아들은 병오(炳五)요 성린의 아들은 기정(基正), 기웅(基雄)이고, 공의열의 아들은 종호(鍾皓)이다. 공은 배위(配位) 서흥김씨(瑞興金氏)보다 뒤에 을해 9월 11일에 졸(卒)하여 묘는 동원 쌓분이다.

후사 재철(在澈)이 그 사종형 귀암 재기(在璂)와 함께 들어난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시어 그의 묘(墓)에 사실을 새기기를 청하시니 같은 모임의 벗으로서 일을 이룩하려는 의지와 기개가 서로 부합하여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행장을 어루만져 이와같이 순서를 매기고 비석에 새겨 명(銘)하기를,

천부적으로 이미 굳세게 지켜온 지조는 역시 강하며 기무(機務)를 보면 역시 밝으니 누가 강인(强人)이라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니 이를 어찌 어질다 하지 않으리오? 나는 이 비명을 지어 품고 있는 강한의지를 영원히 표(表)하노라.
1995년 9월 분성 배문준 짓고 영산 신용출 삼가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