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당공(臨堂公) 하성재(河性在)29세손

공의 휘는 성재(性在)요 자는 경초(敬初)다 진양 하씨인데 고려 사직 휘 진(珍)이 그 상조(上祖)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연(演)이 계시어 문과에 올라 영상을 지내셨는데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요 호는 경재(敬齋)이다 그 아드님 우명(友明)은 호가 연당(蓮塘)인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벼슬을 하셨다. 누전(屢傳)되어 휘 혼(渾)에 이르렀는데.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지내시고 증 승정원 좌승지의 벼슬을 받으셨다. 이상이 가장 드러난 선조이다. 증조님 휘 수권(守權)은 효행으로 동몽 교관을 받으셨고. 조부님 휘 민갑(珉甲)은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내셨다. 황고 휘 종락(鐘洛)의 호는 운계(雲溪)요 선비(先비)는 밀양 박씨(密陽朴氏)광수(光壽)의 따님이요 계모(繼母)는 밀양 박씨 재열(在烈)의 따님이다.

1901년 정월 7일에 군이 청도 금천면 임당리에서 태어나서 70세인 1970년11월 7일에 서울 사직동에서 별세하여 김포 고려 공원묘지에 장사되었다. 부인은 밀양박씨 사인 재복(在福)의 따님이다. 3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진두(鎭斗)요 다음은 진규(鎭奎) 진성(鎭星)이요 사위는 창녕 장두현(張斗鉉) 서흥 김태환(金兌桓)이다. 진두는 조졸(早卒)하여 1녀 뿐이어서 아우 진규의 아들 원호(元鎬)를 양자로 삼았다 사위는 서주 구군택(具君澤)이다. 진규 아들은 출계한 원호와 형호(亨鎬) 이호(利鎬) 정호(貞鎬)이다 사위는 공주 최갑림(崔甲林)이다. 진성의 아들은 인호(仁鎬)요 장두현의 아들은 동표(東杓)요 김태환의 아들은 후영(厚永)과 백영(白永)이다 나머지는 어려서 기록지 아니한다. 군이 어릴 때부터 총명이 특이하여 처음에 그 마을 서재에서 배울 때 문의(文義)가 일취월장하니 스승이 스스로 능히 가르치지 못하갰다 하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비슬산중(琵瑟山中)에 심재 선생(深齋先生)을 찾아 육경(六經) 사자(四子)를 배웠는데 그 때 선배(先輩)인 순재 김재화(金在華)와 홍당 이병호(李秉顥)와 후당 성순영(成純永)과 둔암 이춘환(李春煥)등 제공과 더불어 동문(同門)에 있어 서로 강론하니 성명(聲名)이 크게 나서 글 읽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알았다, 글을 지음에 문사(文辭)가 간략하고 아담하였는데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내어 놓지 아니하였으므로, 유서(遺書)가 그다지 많지 아니하다. 당시 사문거장(斯文巨匠)인 김창강(金滄江) 이경재(李耕齋)등 여러 선생이 다 칭찬하여 후생이 두렵다 하였으니 그 학업(學業)의 깊음을 알 만하다. 평생에 동성(桐城) 방망계(方望溪)선생의 글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이는 그 기미(氣味)가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가산이 본래 넉넉지 아니한데 군이 농사일을 알지 못하고 부친이 또 손님을 좋아해서 문밖에 신이 항상 차니 가세(家勢)가 자연 곤란해진 데다가 부친이 별세하여 3년 상을 지내고 나니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 때 심재 선생이 포산(苞山)쌍계(雙溪)로 이사하니 군이 가족을 데리고 그 곁에 살았는데 일본 경찰이 그 모여 공부함을 미워하여 배우는 사람을 다 쫓아 버렸다.

얼마 후에 선생이 별세하여 군이 의지할 바 없고 세상이 또 크게 변한 고로 생활이 어려워서 부산으로 내려가 의업(醫業)을 시작하여 생활을 유지 하였으니 이는 소시(少時)에 팔이 다쳐 치료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술이 종종 기이하게 맞는 수가 있었으나 자기의 본뜻이 아니엇는데 낮에는 사람들을 응접하고 밤에는 고서(古書)를 밤중까지 읽으니 이웃 사람이 의서(醫書)를 읽는 줄 알고 탄복하여 말하기를「저렇게 읽으니 의술에 어찌 능하지 아니하랴」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만약 지금 같은 형편이 계속되면 몇 해 안에 전답 자본을 장만하여 돌아가 공부하여 본뜻을 이룰 듯하다고 하더니 질병이 겹쳐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운명인가? 이리하여 그 중세(中世) 이후로는 운명을 믿고 분수를 편히 여기며 형편을 따라 살았는 바 일찍이 뜻하지 아니하였던 동아대학(東亞大學)강사가 되었고 또 교서(校書)의 이을 수년간 맡았으며 또 민족문화 교서에 응하여 서울에서 4년간 일하다가 별세(別世)하였다. 만사(輓辭)와 제문(祭文)이 100여편이나 되었는데 다 행의(行誼)의 돈독함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일컫고 수(壽)를 빌지 못하엿음이 한스럽다 함이었다.

그의 저술로는 20대 시절에 이형암(李炯庵)의 사소절(士小節)을 약(約)해서 사소절지절(士小節之節)이라 하여 간행한 것과 우리나라 옛 현인들의 가언선행(嘉言善行) 및 가곡(歌曲)의 풍속 교화(敎化)에 도움이 되는 것을 번역하여 술고록(述告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것이 있다. 또 다섯 권 쯤 되는 시문(詩文)이 인쇄 중에 있어 예원(藝苑)에 좋은 선물됨이 적지 아니할 것이니 가히 헛되게 산 것이 아니라 하겠다. 내 군과 더불어 사귄 지 거의 50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군의 작은 일까지 능히 다 알지는 못하나 그러나 날리 중에 조석상종(朝夕相從)함이 또 10년이 되니 그 평생을 대개 안다 할 만하다 군의 부성(賦性)이 침착하여 한창 연정담사(硏精覃思)함에 종종 회심(會心)의 해득에 이를 때에는 앉아 있음에 거의 그 지키는 바를 잃은 듯하게 되고 다님에 문득 그 갈 바를 잊은 듯 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일찍이 험난한 일로 그 지조가 흔들리는 일이 없었고 혹 여러 친구와 술에 취하여 농할 때는 근칙(謹飭)하는 행검(行檢)이 거의 없는 듯하엿어도 그 중심을 살펴봄에 요동하지 않음이 있었으니 겉으로는 유하고 안으로는 강함이 이와 같았다.

남의 급한 일을 보면 심력(心力)을 다하여 구하되 자신에는 큰 어려움이 있어도 조금도 안색과 말에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평생에 빠른 말투와 급거한 안색이 없었으니 가정이 화목하였다 여섯 살에 모친을 잃어 항상 한이 되었는데 계모를 섬김에 더욱 정성을 다하여 상을 당하여 예절과 애통을 구비하니 조객들이 탄복하였다. 그 전상(前喪)치름은 내가 보지 못하였으나 이로 미루어 가히 알 만하다, 모든 아우를 사랑하여 각각으로 그 직업을 주어 성취하게 하고 자녀를 가르침에 의방(義方)으로 하여 남한테서 칭찬을 들었으니 이것이 그 집을 다스리던 대략이다. 이것이 나의 본 바이므로 위와 같이 삼가 지어서 써 입언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