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공(澹軒公) 하우선(河禹善)31세손

사산(士山) 선생 진양 하공의 휘는 우선(禹善)이요, 자는 자도(子導)이며, 호는 담헌(澹軒)이다. 선계(先系)는 고려 사직 휘 진(珍)으로 비롯되어 여러 대(代) 후에 휘 즙(楫)은 호가 송헌인데, 진천 부원군에 봉해지시고 원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그 아드님은 휘가 윤원(允源)이요 호가 고헌인데, 홍건적을 토벌한 공로로 진산 부원군에 습봉하시었다. 그 아드님은 휘가 자종(自宗)인데 군부상서로 고려가 망할 때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호는 목옹이다. 그 아드님 휘 결(潔)은 조선조에 들어와 대사관이 되셨다. 여러 대(代)를 지나 휘 홍달(弘達)은 증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인데, 호가 낙와처사(樂窩處士)다. 아드님 휘 철(澈)은 증 사헌부 대사헌이요 세상에서 일컫는 설창(雪窓) 선생이시니 : 이분들이 공의 8세 이상 선조이시다. 고조님 휘는 재원(在源)이요, 증조님 휘는 상호(相灝)이다. 조부님 휘는 응로(應魯)인데 호가 이곡(尼谷)이요, 선고(先考)의 휘는 재도(載圖)인데 호가 사와(士窩)이다. 이 양세(兩世)가 모두 문학과 행의(行誼)로 칭송을 받으셨다. 선비는 강릉 김씨인데, 회경(會卿)의 따님이시다.

고종 갑오(1895)년 10월 8일 자시에 공이 진주 서쪽 심방동에서 태어나신 바, 총명함이 뛰어나 낮에도 능히 별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여섯 살에 이곡공이 육십갑자를 써서 가르치고 그 날 밤에 불러 강(講)을 받으니, 한 자의 착오가 없었다. 여덟 살에 징군(徵君:왕이 불러도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 곽 면우 선생을 뵙고 물으시기를,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의 아비를 죽였는데, 우(禹)가 그 천하(天下)를 받은 것이 옳습니까?」하시니, 두 분께서 더욱 장면(裝勉)하고 사랑하여 원대(遠大)한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셨다. 기유(1909)년에 안 중근 의사가 나라의 원수인 이등 박문을 죽이고 여순(旅順)의 옥에서 사형을 당하였으므로, 공이 제문을 지어 애도하니, 당시의 사람들에게 즐거이 읽혀졌으므로, 왜놈 헌병이 듣고 체포하여 가두려 하였으나, 공은 절간으로 피신하여 다행히 면하였다.

갑인(1914)년 봄에 면우 곽 선생을 뵈어 경의(經義)를 강질(講質)하셨으며, 경신(1920)년 여름에 하 회봉(河晦峯) 선생이 모록산방에서 강론할 때 공이 가셔서 따랐다. 또, 국내(國內)의 큰 선비인 조 일산(趙一山), 노 소눌(盧小訥), 권 청산(權晴山), 이 산정(李山庭), 조 심재(曺深齋) 등 제공(諸公)을 역방(歷訪)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토의하셨다. 신미(1931)년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여 예설을 읽는 여가에 설창(雪窓), 이곡(尼谷) 두 분의 실기(實記)와 문집을 편찬하여 세상에 간행하셨다.

이 때에 단발령이 극심하여 왜놈 헌병이 공이 제일 젋은 사람으로서 보발(保髮)하고 있는 것을 가장 심히 미워하여 기어이 억지로 깍게 하였다. 그래서, 공과 구졸계(九拙契)를 만든 사람들을 정찰하여 경무국(警務局)에 무고하였기로 호출하거늘, 공이 노하여 꾸짖어 이르시길, 「나는 터럭만큼의 죄를 범한 일이 없거늘 곤욕스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대들은 과연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하고 호통하시니, 국장이 그 잘못되었음을 알고 사죄하였다. 을유(1945)년 해방 뒤에 덕천 서원의 원임(院任)이 되어 유계를 만들어 덕천 서원의 동재(東齋)를 창건하셨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공에게 덕천 연원록(德川淵源錄)의 편집을 맡겼다. 원래 이 연원록은 여러 번 의론되고 여러 번 중단되었는데, 이것은 사림 중에 힘써 저지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이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였으나 마침내는 더 사양하지 못하고 말씀하시되, 「이 일은 우리 선조께서 정성을 다하셨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하시고 드디어 결심해 굽힘 없이 추진하여 4년에 걸쳐 완성하셨다.

만년에 사산 서당(士山書堂)에서 기거하셨는데, 그 서당은 문인제자(門人弟子)들이 공을 위하여 지어 학문을 강론한 곳이기에, 공을 모두 사산(士山) 선생이라 일컬었다. 을묘(1975)년 9월 27일에 돌아가시니 : 향년에 82였는데, 사시던 뒷산에 장사되셨다. 배위는 함안 조씨인데, 용효(鏞斅)의 따님이시다. 3남, 3녀를 두셨는데, 세 아드님은 태구(泰九), 태영(泰纓), 태일(泰鎰)이요, 세 사위는 성주 이 달근(李達根), 진양 정 동년(鄭東年), 진양 강주혁(姜周爀)이다. 태구의 아들은 유즙(有楫)이요, 태영의 아들은 창즙(昌楫), 이즙(利楫), 필즙(畢楫)이요, 태일의 아들은 택즙(擇楫), 정즙(定楫), 해즙(海楫)이며, 유즙(有楫)의 아들은 성옥(性鈺)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못한다.

공이 돌아가신 지 3년 되던 정사(1977)년에 일찍이 공에게서 수학한 여러 사람들이 문집을 발간하고 묘비를 세워 이지러짐 없기를 도모하려 하여 행장을 갖추어 보잘것없는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는 바, 돌아보건대, 내가 일찍이 사산 서당의 기문을 씻고 이제 또 묘비문의 맡김은 당하였으니, 이는 대개 문자의 인연이 생전과 사후에 깊이 맺어져 있기 때문이리라. 대개 공의 학문은 한결같이 실천의 독실함에 말미암음이니, 그 문사(文辭)에 능하여 세상에서 많이 일컬어지고 있으나, 이것은 공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조그마한 분아였을 뿐이다. 이에 그 마음 가짐과 행동을 절제함의 큰 것을 근본으로 삼고 만사나 제문(祭文)에 나타난 글을 참작하여 보면 절연(截然)하게 절벽이 높이 솟은 기상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그 위엄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말하고 웃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것 같도다. 이에 명(銘)한다

연원(淵源)을 살펴보면 멀리 남명(南冥) 선생에 이르나니,

경의(敬義)의 학문을 닦아 호연(浩然)한 기상 가득하였네.

확연(確然)하게 자신을 지킴에는 용(龍)이 물 속에 잠겨 있는 것 같고,

결연(決然)히 해야 할 일 당해서는 창으로 찌르듯 과감하셨네.

물가에 이르고 엷은 얼음 밟는 조심으로 80 평생이 온전하셨으니,

묘 앞에 어찌 아첨하는 글 쓰리요? 신령의 눈이 거울같이 비추어 보는 것을.

능곡(陵谷)이 옮김 없는 한 비석은 이지러짐 없을 것이요.

비석이 이지러짐 없다면, 내 이름도 함께 영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