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명 효자정각 향토유적 제11호 지정일 : 1988년 5월 31일 시흥시 신천동 소산서원 입구
 

孝子 하우명(河友明)

조선 초기의 효자. 호는 연당(蓮塘)이며,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한 하연(河演)선생의 셋째아들이다. 시흥시 신천동에 살았다. 아버지가 세자(문종)의 스승이었던 은고(恩顧)로 32세 (1444)때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37세(1449)에 철원부사(鐵原府使),41세(1453)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나, 계유정 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신천동에서 은거하였다. 선생은 시흥이 자랑하는 효자 중의 한분이다. 선생의 아버지(경재 河演선생)가 영의정에서 물러나 집 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 선생은 글 읽기와 해학으로 기쁘게 해 드렸다. 또한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꼭 몸소 맛보고 손수 조리한 것이 아니면 드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연로하고 노환이 있어 희로(喜怒)의 일정함이 없었는데, 선생이 몸소 회초리를 맞다가도 곧 웃고 노래하여 조금도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병환이 오래가자 받들어 모시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급기야 아버지가 78세로 돌아가시자 상례를 극진히 하여 3년상을 마쳤으며 한번도 내당(內堂,내실)에 들지 않았다. 또 조석의 제수를 꼭 친히 갖추었고, 땔감이나 제수에 있어서도 손수 마련하며 노복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거상기간(居喪期間)이 끝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소래산의 묘소(위치, 신천동 산 12)옆 별장으로 돌아가 공경을 다 하였다. 얼마 뒤 세조가 도진무절제사(都鎭撫節制使)의 벼슬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 다. 어머니가 노환으로 식음이 감소하자 수륙(水陸)의 진미를 구비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혹 드시고 하는 것이 있으면 꼭 구해드렸다. 그물 등 어구를 손수 만들어 친히 고기잡이 와 사냥을 하되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게장(게醬)과 꿩의 간, 곤줄박이회(山 雀회)를 즐겨 들자 미리 가을 게를 구하다가 진흙 담은 항아리에 저장하여 아무리 겨울철이 라도 게장이 궁핍하지 않았다.

선생이 친히 노복자 자손들을 거느리고 숲속에 그물을 쳐서 꿩을 몰이하여 잡았는데, 간혹 길손들이 보면 그 정성에 감동하여 도와주었다. 어머니도 선생이 조리한 음식맛을 알았고, 만약 사고가 있어 친히 조리하지 못하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76세(1465)에 돌아가시자 슬퍼하기를 거의 멸성하기에 이르렀고, 장손 복산(福山) 큰조카와 함께 묘 옆에 영당을 지어 늘 삭망(朔望, 초하루와 보름), 절일(節日), 기제(忌祭)때에 풍혐(豊혐)을 참작하여 도식 (圖式)을 정하여 친히 제수를 갖추었다. 기제사(忌祭祀) 등 별제(別祭)에는 꼭 먼저 돌아가신 (孝明)형제의 위패를 앞에 배설하고 함께 제사하며 말하기를 "부모의 평생에 자손들이 함께 슬하에 있는 것을 기뻐 하셨는데 유명(幽明, 저승과 이승)이 어찌 다르겠는가" 하였다. 시묘(侍墓)할 때, 하루는 묘 앞에 석등을 설치하고 밤새도록 등불을 밝혔다. 하루는 등불 이 꺼지고 등잔이 넘어지자 선생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호곡하며 탄식하였다. 이튿날 묘 주위를 살펴보니, 붉은 여우 한 마리가 등잔의 대석(臺石)앞에 죽어 있었다. 또 호랑이 한 마리가 여막(廬幕) 밖에 걸터앉아 제사를 마치고 선생이 그 음식을 주면 먹고, 다시 와서도 해롭게 하지 않았다. 제사를 올릴 때는 언제나 오리를 올렸는데, 하루는 갑자기 호랑이가 잡아가 버렸다. 이에 선생이 "이것은 우리 선인(先人)을 제사할 물건인데 호랑이가 비록 짐승이나 어찌 나의 마 음을 알지 못하는가?"하며 탄식하였다. 이튿날 잡혀갔던 오리가 저절로 돌아왔는데 조금도 손상된 곳이 없었으므로 마을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선생은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자손이며 일찍이 추밀(樞密)에 들었으나 부귀한 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태도를 바꾸어 효도를 생각한 것과 효행의 독실함이 온 고을을 감복시켰고 온 나라에 소문이 났다. 이에 71세 때(1483)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 안호(安瑚)가 선생의 효행을 조정에 상신(상신)하였다. 이어 예조에서 "인천에 사는 전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하우명은 어려서 양 친을 봉양함에 있어서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친히 스스로 집찬(執饌)하며 정성을 다 하였다. 어버이가 돌아가자 여묘(廬墓)살이 3년상을 하면서 직접 땔감을 져다가 밥을 지었고, 복(服)을 마치자 장손 복산(福복山) 큰조카와 함께 묘(墓) 곁에 영당(影堂)을 만들고 초하루와 보름에 전(奠) 드리기를 폐하지 않았으며, 무릇 계절의 물건이면 반드시 이를 올렸으니, 그 효성이 순박하고 지극합니다. 청컨대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하여 권장하소서"하며 아뢰자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정문을 세우고 호세(戶稅)를 면제해 주어 풍속을 권장토록 하였다. 그 뒤 인조 2년(1624)에 합천 신천서원(新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선생의 정려비(旌閭碑)의 비문은 부사 최흔(崔昕)이 지었고, 성종 6년(1475)에 강희맹이 지은「소래하중추 정문기(蘇 萊河中樞旌門記)」를 1995년에 진양하씨 문효공파 중앙종친회에 의해「효자동지충추부사 연당진양하공정문기비」가 세워졌다. 묘는 시흥시 신천동 소산서원 옆(서편)에 있으며,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위해 세운 효자정 각(위치, 신천동 422)은 1988년 5월 31일에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효심이 지순하여 진작 알려진 이름 모친상에 시묘하되 생시처럼 섬기셨네

        집안에 종이 있었건만 땔나무를 짊어짐은 내 정성 다함일 뿐,

        상복을 벗고서도 추모함 못 잊어서 부모 모습 그리어 영당을 세웠다네.

        철 따라 새 음식 바친 두터운 효성, 청사에 꽃다운 이름 길이 전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