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子鳳菴 하병호(河炳鎬)

우리 고을 샛골에 근래의 효자가 있으니, 호는 봉암(鳳菴)이다. 하공(河公)의 휘는 병호(炳鎬)요 자는 응명(應明)이다. 그 윗대는 진양인(晋陽人)이다. 조선조 영상 문효공 휘 연(演)이 가장 현달한 조상이다. 이 분이 동지중추부사 연당 휘 우명(友明)을 낳으셨는데, 이 연당공이 효행으로 정려사액(旌閭賜額)을 받으셨다. 이 분이 곧 공의 14대조이시다. 9세를 내려와 통정대부 죽오 휘 세진(世晋)이 또한 효도로 정려를 받았는데, 이 분이 곧 공의 6대조이시다. 통정이신 아버님 호 연정 휘 정기(禎基)가 칠원윤씨 창의(昌義)의 따님과 혼인하여 1872년에 공을 낳으셨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음식 조리와 침소 보살핌에 마음을 쏟고 기거(起居)와 응답(應答)에 조심을 기울였으며 사랑과 공경을 아울러 갖추어 부모님의 몸과 뜻을 함께 봉양하였고, 아버님 병환 간호에 정성을 다하여 의원을 불러 약 쓰는 데 부지런하셨으니, 병환에 좋다는 약을 들으면 반드시 이를 구하여 시험하고야 말았다.

일찍이 제창(濟昌) 땅에 약을 구하기 위하여 새벽에 출발하여 밤 늦게 돌아오는데 흉악한 바람과 모진 눈속에서 범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또, 아머님 병환에 시탕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는 바, 일찍이 하늘에 빌되 정성을 쏟지 아니한 바 없었으나 운명하게 되어 온 집안이 놀라 어찌할 줄 모르던 중, 공이 손가락을 깨어 피를 넣어 회생하게 하여 12년이나 더 사시게 하였고, 돌아가심이 애통이 심하여 몇 번이나 기절하였으며, 장례 범절에 정성을 유감 없이 다하였거니와, 2년간의 시묘살이에 여위어 뼈만 남았다. 매양 제삿날을 당하면 종일토록 슬퍼하였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들도 모두 효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웃 마음에서 그 효성에 감동하여 포상함이 여러 번 있었다. 공이 별세하시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기를 「공의 효행을 묻히게 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음이 옳겠는가? 이는 우리 마을의 수치이다」하여 이에 마을로부터 고을로, 고을로부터 도(道)로 번져 모두가 포창하였고, 그밖에 사한가(詞翰家)들이 듣고 감탄하여 글을 보내 칭송하기를 거듭하였으니, 지금과 같이 기강이 부너진 사회에도 떳떳한 인륜의 성품이 아직 아주 없어지지는 않은 것을 여기서 보겠도다.

또, 생각하건대 연당(蓮塘), 죽오(竹嗚) 두 분의 정려 특전을 받은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효도인데, 공이 또 미덕을 이어받아 실천하였으니 그 누가 영지(靈芝)와 예천(醴泉)을 근원이 없는 것이라 이르겠는가? 어느 날 공의 손자 태용(台容)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의 조부님께서 효행이 있었으나, 지금 국사가 변하여 이런 일을 알릴 곳이 없어 나라에서 내리는 포창을 못 받아,이일이 인멸하여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허던 차에 사람의 공론이 있으므로, 길가에 비를 세워서 그 유적(遺蹟)을 드러내기 위하여 어르신의 글을 비석에 새기고자 하오니, 바라옵건대 말씀의 은혜를 아끼지 마옵소서」하기에 내가 그와 같은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하였으나 태용군이 재삼 와서 청하길 더욱 간곡히 하니, 가히 대대로 효성이 있는 집이라 할 수 있겠도다. 이에 그 행장에 의해 서술하면서 이 세상에 아버지를 모르고 할아버지를 배반하는 자들을 일깨우노라. 이에 명(銘)한다.

진양 하씨의 오래 된 집안이 효도를 전통으로 삼으매, 공이 이에 삼가 지키어 아름다운 풍습을 터전 삼아 이어 살았도다. 백 가지 행동을 미루어 볼 대 어찌 돈독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정려할 것을 정려하지 않은 것은 자손에게 한이 되리로다. 비를 길가에 세우니, 빛나는 아름다운 자취 되었네. 이로부터 아름다운 이름 천추에 썩지 않으리라. 누가 사람의 아들이 아니며, 뉘게 양심의 인륜이 없으리요? 무릇 저 길 가는 사람은 이를 보고 규범 삼을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