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공 22세손 징도(徵道) 정도(呈道) 형도(亨道) 현도(顯道) 4형제의 효성을 기리는 遺墟碑

사선생 유허비(四先生 遺墟碑)

한집 가족이 꼭같이 효도함과 한 가족이 꼭같이 학문을 이룸은 아주 썩 드문 일이다. 하씨 형제분 사공(四公)께서 한 집에서 꼭같이 상냥하고 아름다우시어 효도하고 학문을 이루셨음은 하씨 집안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하씨는 진주의 명문이어서 송헌(松軒). 고헌(苦軒). 목옹(木翁)선생으로부터 문종조 명신(名臣) 문효공(文孝公) 및 연당공(蓮塘公)에 이르기까지 문장과 덕행이 대대로 이어졌다. 공의 황고(黃考)님 때로 내려와서도 학행(學行)이 옛 명성(名聲)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였으니, 젊으실 때에 문모계(文茅溪), 이오봉(李五峰), 유서애(柳西厓)의 학술 토론장에 나가니 일세의 큰 유학자로 인정된 일이 그 때문이다. 형제 네 분이 부모님께 꼭같이 효도하고 몸을 닦음에 학문을 꼭같이 하였다.

맏형이 효도하였는데, 둘째. 셋째. 넷째 아우들도 또한 효도하였고, 세 형제들이 학문하였는데, 맏형도 또한 학문하였으니, 아마도 몸은 나뉘었어도 마음은 나뉘지 않았음이다. 결혼한 후 네 형제의 부인들이 모두 남편을 좇아 어진 행동을 하므로 집안에 아무런 험될 말이 없었다. 형님과 아우가 꽃받침을 잇댄 듯 고루 향기로웠으며, 어깨를 나란히 한 듯 다같이 뛰어나서 일행(一行), 일언(一言)을 안에서는 가족들이 우러러보고, 밖에서는 고을 사람들이 경모(敬摹)하였으니, 그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가 바로 법도가 되었음이 이와 같았도다. 공께서 상(喪)을 당하매 들에는 농부가가 끊기고, 공께서 학문을 독실히 하시매 거리에 글 외는 소리가 퍼졌으니, 네 형제분은 진실로 한 고을의 대군자(大君子)이셨다. 아! 네 형제분의 행실은 영모록(永摹錄)에 나타나 있음이라.맏형의 휘는 징도(徵道)요 자는 문서(文瑞)요 호는 수용인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모습이 남달랐으므로 일가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자기 아기는 내려놓고 공을 안아 예뻐하였다. 4. 5세에 당시(唐時)를 외웠고, 7. 8세에 기묘한 글을 지었으며, 10세 후에 논어, 맹자, 중용, 대학, 효경(孝經)에 능통하였고, 장성여서는 경전(經傳)을 즐겨서 밤과 새벽을 모르고 지냈으며 늘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으니, 여러 아루들이 하나같이 공의 법도를 따랐다.

둘째의 휘는 정도(呈道)요 자는 경서(景瑞)요 호는 서악(西岳)인데, 경학(經學)에 밝았고 책문(時書에 대한 논설문)과 부(賦)에 더욱 능하였는데, 163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낭서(郎署)에 이르렀으나, 지조를 지키고 끝내 싸움을 피하니 사람들이 위인(偉人)으로 여기었다.

셋째의 휘는 형도(亨道)요 자는 명서(明瑞)요 호는 취은(醉隱)인데, 천성이 순효(純孝)로워서 몸소 고기잡고 사냥하여 부모님 봉양에 맛있는 음식이 끊이지 않게 하였고, 학문 연구를 철저히 한 데다 시문 짓기를 정교히 하였다.넷째의 휘는 현도(顯道)요 자는 휘서(輝瑞)요 호는 모정(茅亭)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병란을 만났을 때 여러 형님들과 번갈아서 부모님을 업고 바위 골짜기에 숨어서도 부모님께 평상시와 다름없이 좋은 음식을 바치었다. 동계(桐溪) 정선생(鄭先生)이 한 번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공은 초려 선생(草廬先生)과 난형난제(難兄難弟)이니, 순상(荀爽)집안 8형제 중 넷이 하씨 집에 있다」하였다.

전북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