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열비각(孝烈碑閣)사직공 29세손 휘 수범(守範)의 배위 충주석씨의 효열부를 기리는정각

효열부(孝烈婦)유인(孺人)충주석씨 行狀

 

유인(孺人)은 충주 석씨인데, 예성군(芮城君) 휘 인석(隣石)의 후예요, 학생 진하(鎭夏)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모습이 고우셨는 바, 들어 다름에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셨다. 20세에 하수범(河守範)에게 출가하였는데, 이 분은 진양 하씨요, 영의정 문효공 휘 연(演)의 후예이고, 숭정대부에 증직된 호군 종해(宗海)의 아드님이다. 유인(孺人)은 시부모님 섬기기를 친부모님 섬기듯 하였으며, 낭군님을 공경함에 서로 대하기를 손님 대하듯 하였다. 제사를 받듦에 살아 계신 듯이 공경하였으며, 동서간에 우애를 지키어 종족간에 화목을 이루었다. 시아버님 상(喪)을 당하여 정성을 다 하고 또 조심하여 조석 상식에 예를 다하여서 이웃을 감동(感動)시켰다.

또, 80세가 넘은 시어머님께 순종하고 더욱 삼가며 혼정신성(昏定晨省)하여 침소를 편안하게 하고, 배고프고 배부르심에 때 맞추어 맛있는 음식으로 잡수실 수 있게 하며, 어린아이를 보살피듯 그 뜻에 순종하고 엄부(嚴父)를 받들 듯 그 명(命)을 공경하니, 사람들은 모두 효부라 일컬었다.얼마 후 낭군님이 병드셨으므로, 의원을 맞아 오고 약을 짓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하였으나 위독하게 되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유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남편이 병들었거늘 어찌 구원하지 않으리요?」하고 손톱을 깍고 머리 감으며 재계하고 깨끗한 옷을 입어 밤중에 단(壇)을 세워 百번이나 절을 하고 이르기를 「황천 황천(皇天皇天)이시여, 제 남편의 병을 낫게 해 주옵소서. 남편이 살아나는 날이면 제 몸으로 명(命)을 대신하리이다」하였더니, 말이 끝나자 갑자기 혼미하여져 정신이 없어졌다가 얼마 후 꿈에서 깨어난 듯 술에서 깬 듯하여 가뿐한 몸이 태화(太和)의 세상에 있는 것 같고, 낭군님은 스스로 정신이 나는 듯하거늘 유인이 낭군님의 방에 가서 살펴보니, 기미가 변동하여 소생할 기운이 있기에 집안 사람들도 노소없이 모두 축하하였는데, 조금 후 들으니 유인은 이미 당신 방으로 들어가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아, 이 죽음이야말로 모진 병이나 극약 때문이 아니었고, 또는 칼로 찌르거나 베로써 목을 맴이 아니었도다. 남편과 목숨을 바꾸려는 정성이 옹연히 상제(上帝)에게 감통(感通)하였기 때문이다. 옥황상제(玉皇上帝)께서 단(壇) 위에서 빌 때의 약속을 암암리에 중하게 여기셨음이로다. 어찌 그렇게도 열렬(烈烈)하셨던고? 대개 부녀자들로 효부되고 열녀된 분들이 옛날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으리요 마는 한 사람이 효부와 동시에 열녀가 된 분은 적었고, 사람의 병에 하늘에 빌어 자신으로 대신하여 줄 것을 청한 사람이 예보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으리요 마는, 능히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거의 죽어 가는 사람을 소생시킨 사람이 또한 몇사람이나 되던고? 하늘에 비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요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목숨을 대신하려는 마음이 어려움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대신 죽어 가기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로다.

그러므로, 사림(士林)이 감동하여 잇따라 목사(牧使)에게 품신한 덕이 두번 있었고, 감영(監營)에 호소한 적이 한번 있었으며, 장례원경(掌禮院卿)에게 고(告)한 적이 한번 있었고, 아울러 경학원(經學院)의 포창장(褒彰狀)이 있어 모두 칭찬하고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였으니, 즐겁다 그 아름다움이여 ! 온 나라 사람들의 양심이 모두 같은 것을 볼 수 있으나, 당시 나라가 망한 때이므로 정문(旌門) 세우는 은전을 도모할데가 없었으니 아깝도다. 열부(烈婦)의 아들 순호(順鎬)가 정성을 다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고, 아우 선호(善鎬), 두호(斗鎬)와 장손 태숙(泰淑)이 바야흐로 거액을 마련하여 공의(公議)를 거쳐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니, 또한 없어지지 못할 교훈이다. 열부여, 그 뒤가 있음이로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련2리 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