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열부(孝烈婦)밀양박씨(密陽朴氏)行狀

 

주역 항괘(恒卦)에 이르기를 「그 덕을 항상하면 정(貞)하니 부인은 길하다」하였고, 상(象)에 이르기를 「부인이 정(貞)하여 길함은 한 남편을 좇아 일생을 마치기 때문이다」하였으니 한 남편을 좇아 일생을 마치면 부인의 도리가 다하여져 열(烈)이 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열(烈)을 논하는 사람들이 남편이 죽으면 곧 따라 죽는 것이 열(烈)의 큰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의(義)에 나아가는 마음이 살고자 하는 마음을 이겨서 능히 목숨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 집을 하늘로 삼는 것이라, 하늘이 망할 때 누가 따라 죽고자 아니하리요마는, 다만 각각 그 형편을 따라 의(義)를 취해야 할 경우가 있다. 만약 그 몸이 남의 맏며느리로서 시부모를 봉양하여야 할 책임이 중하고, 무릎에 외로운 어린 자식이 있어 인륜상 어여삐 길러야만 할 처지이면, 마땅히 뜻을 굽히고 살아서 시부모를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길러 그 남편의 가정을 바로잡는 것이 또한 의(義)의 큰 것이니 어찌 한갖 따라 죽는 것만을 의로 삼고 행연히 눈을 감는 사람과 비교하리요?

우리 고을 야로면 구정리에 효열부(孝烈婦)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있었으니, 죽포(竹圃) 노성(魯成)의 따님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과 삼감이 지극하였는 바, 18세 때에 사인(士人) 진양 하형원(河亨源)과 혼인하였는데, 이 하공은 문효공 휘 연(演)의 후손이요, 정헌(汀軒) 정(錠)의 아드님이다. 유인(孺人)이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기고 공손으로 남편을 받들어 일가와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더니, 불행히 남편이 중한 병환으로 수 년간 고생하니, 유인이 정성을 다하여 구호하는 한편, 집 뒤에 단을 모아 정화수를 떠 놓고 당신으로 남편의 죽음에 대신하게 해 주기를 빌었으나, 소원대로 되지 않아 남편이 운명하려 하매, 손가락 피로 수일간 명을 연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별세하였는 바, 유인의 나이 26세라, 애통하여 살 수 없을 듯하여 따라죽고 싶은 마음 굳어져서 음식을 전폐하였는데, 시부모님이 밤낮으로 무한히 위로하고, 세 살 된 어린 아이가 무릎에서 울고 있는지라 유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죽는 것도 분수에 매여 있다 하고, 일어나서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부도(婦道)에 힘써 효도(孝道)와 공경(恭敬)으로 시부모님을 편하게 모셨다. 몇 해 못가서 시부모님 내외분이 잇따라 별세하시니, 부채(負債)는 산같이 쌓여 살아 갈 방도가 막연한지라, 유인이 백 가지 신고를 겪어내면서 채무(債務) 정리를 다하고 아드님 병우(柄祐)를 눈물로 길러 내고, 양식을 싸서 보내면서 학업을 성취하도록 하셨으니, 아름답도다 그 어짊이여!

이창기(李昌基)를 비롯한 모든 사림(士林)과 유도회 회장 배운효(裵雲孝), 전교 권대순(權大淳), 성균관 관장 성낙서(成樂緖) 등이 기꺼이 포창하고, 장차 비석을 큰 길가에 세워 떳떳한 유적을 빛내려고 이 무능한 사람에게 글을 청하매, 의리상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명(銘)한다.
의(義)에도 이 것과 저 것이 있고, 죽어야 함과 살아야 함도 처지에 따라 다르다. 시부모님을 섬겨 효성을 다하셨고, 의(義)로써 아드님을 가르치셨다. 죽는 것도 진실로 쉽지 않고, 사는 것도 또한 고통이다. 춥고 배고파 시든 몸으로 움직이고 참아 기둥을 세웠다. 마침내 효와 열을 이루셨으니, 인륜을 가르치는 교육에 도움됨이 있으리라.